남편이 된 남자 친구
02/14/22  

연애 당시 남편은 스윗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웠다. 국민학교 동창이었고 친구로 재회했음에도 불구하고 사귀기로 하자마자 그는 바로 딴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나를 다르게 대했다. "야", "너"라는 호칭은 순식간에 "자기"로 바뀌었고 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애틋하고 사랑스러웠다. 나는 줄곧 통통한 몸매를 가리느라 옷을 크게 입는 편이었는데 "네 사이즈는 스몰이야."라고 알려준 것도 남편이었다. 나는 그런 남편이 좋았다. 첫사랑의 아픔도, 크고 작은 상처들도 잊을 수 있었고 그와 함께면 편안했고 만나서 헤어질 때까지 제대로 사랑받는 기분에 취해 있었다. 그와 함께라면 모든 것이 잘될 것 같았고 그 어떤 시련이 닥쳐도 그는 모든 것을 해결해줄 히어로 같았다. 그렇게 연애 3년, 결혼 17년이 훌쩍 지났다. 

 

얼마 전 남편과 외출하는데 평소보다 준비가 조금 늦어졌다. 마스크를 쓴 이후로 민낯으로 다니는 일이 많았는데 이날은 오랜만에 데이트 기분을 내볼까 싶어서 화장을 했더니 준비가 조금 더뎠다. 그러자 남편은 왜 이렇게 준비가 오래 걸리냐며 뽀로통해졌고 그걸 풀어본다고 방에서 나오며 "나 예뻐?" 했더니 남편이 "가부키 같네." 하는데 헛웃음이 나왔다. 쳇 마지못해라도 그렇다고 해주면 얼마나 좋아. 남편들은 어째서 부인에게 빈말을 하지 않는 걸까?  아니 왜 일부러 더 삐딱하게 이야기하는 걸까? 엄마랑 심리전 중인 사춘기 아들처럼 "응"이라는 손쉬운 정답이 정해져 있는데도 '최대한 나는 삐뚤어질 테다. 절대 네가 원하는 대답을 해주지 않겠어' 하는 그 심리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첫 아이를 출산하고 한참 힘들 때 잠시 부부 관계에 위기가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때 내가 남편에게 갈구했던 것은 그냥 "나 좀 예뻐해 줘."였던 것 같다. 하지만 간절하면 이루어...... 지기는커녕 오히려 멀어져 가는 것만 같았다. 나는 불행했고 그런 나를 그는 못마땅해 했다. 나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던 그 두 눈이 나를 못마땅하게 보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네가 뭔데 나를 안 예뻐해? 이러려고 결혼했나? 나 좋다는 사람들도 많았건만 (사실 그리 많진 않았다) 내가 왜 너랑 결혼을 해서 이런 대접을 받나...... 구구절절 처량하다 못해 불쌍할 정도라 되돌아보면 부끄럽지만 그때 분명 나는 그랬다. 어떻게 그 위기를 극복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후로 아이를 셋이나 더 낳았으니까 그럭저럭 잘 극복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조금만 내 심기를 건드리면 걸핏하면 "이럴 거면 우리 헤어져."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며 까탈스럽게 굴던 그때가 좋았지. 지금은...... 무릎을 꿇고 가만히 내 신발끈을 묶어주던 남자 친구는 이제 내가 신발끈을 묶고 있으면 저만치 먼저 가버린다. 방안에 있는 파리 한 마리 무서워서 못 잡는다고 호들갑 떨며 전화했더니 파리 잡아주러 집에 오던 남자 친구는 이제 모기 한 마리도 안 잡아준다. 미용실에서 머리를 하고 온 날이면 예쁘다며 데이트 가자던 남자 친구는 이제 내가 머리를 짧게 자르면 나이 들어 보인다고 하고 머리를 기르면 머릿결이 안 좋아 보인다고 한다. 남자 친구가 남편이 되며 달라진 것들을 나열하자면 2박 3일도 부족할 듯하지만 발렌타인 데이이니 이쯤 해두기로 한다.

 

그리고 훈훈한 마무리를 시도하자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남편은......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잘 기억해주고 꼭 챙겨준다. 요즘엔 웬만한 것은 다 휴대폰을 이용하는데도 매년 나에게 다이어리를 사주고 이따금씩 내게 책도 사준다. 왕년에 문학소녀였던 내 취향을 고려한 선물일 것이다. 그리고 본인은 술 한 모금 안 마시면서도 안주로 걸맞은 요리가 나오면 항상 먼저 내게 술을 권하고 새로 나온 신상 맥주나 프로모션 와인도 사준다. 술 마시는 아내를 둔 술 안 마시는 남편의 마음 씀씀이가 참으로 너그럽다. 그밖에도 발렌타인데이, 화이트데이, 크리스마스, 생일, 결혼기념일, 하다못해 빼빼로데이마저 나보다 더 잘 챙기는 것도 남편이다. 

 

얼마 전 남편이 퇴근 후 집에 돌아와 "자 선물,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하고 내민 것은 다름 아닌 장아찌였다. "어우 뭐 이런 걸......" 했지만 정말 고마웠고 또 정말 맛있었다. 나는 그 장아찌를 애지중지하며 아무도 안 주고 매일 혼밥 할 때만 조금씩 덜어서 먹고 있다. 20대 때 죽네 사네, 헤어지네 못 헤어지네 하며 울고불고했던 날들에 비하면 지금 이런 소소한 순간순간이 그 무엇보다 더 대단한 사랑처럼 느껴진다. 살면 살수록 부부의 세계는 마치 다크 초콜릿 같다. 우리 둘 외에도 얽히고설킨 것들이 가득하다 보니 연인 관계였을 때와 달리 많이 쌉싸름하지만 그래도 순간순간 불쑥불쑥 입안에 맴도는 달콤함 때문에 때때로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 짓고 있다. 

 

18년 전 2월 14일, 석양이 비치는 바닷가에서 나는 프러포즈를 받았다. 사는 내내 봄날만 같았다면 거짓말, 비도 오고, 눈도 오고, 바람도 불고, 아...... 태풍도 불고? 쓰나미도 왔었던가? 암튼 그랬지만...... 우리는 오늘날까지 두 손 꼭 놓지 않고 잘 견디고 참아내며 사랑했다고 한다. (아...... 이번 칼럼도 마무리가 역대급으로 억지스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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