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직장인
02/21/22  

늦겨울과 이른 봄 사이. 이 무렵이 되니 재작년 잠시 직장인으로 살았던 때가 기억난다. 그때 나는 무슨 바람이 들었던 걸까…... 갑자기 취업 앱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첫째가 중학교 진학을 앞두고 있었고 한국살이도 3년 차에 접어드니 뭔가 새로운 일을 도전해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잠이 오지 않던 어느 밤 나는 즉흥적으로 이력서들을 올렸고 연락 온 회사들 중 처음으로 면접 본 회사에 덜컥 취직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나는 다소 뜬금없이 화장품 제조회사에서 론칭한 자사 브랜드 온라인 사업부 소속으로 한국에서 첫 직장 생활을 하게 되었다. 작은 부서였지만 나름 매주 미팅을 했고 보고서를 잘못 썼다고 핀잔을 듣기도 하고 칼퇴근할 때마다 눈치를 보고 근무시간에 메신저로 상사 험담을 보는 등 직장 생활의 A to Z를 경험하기에는 충분했다. 

 

본사는 성남에 있고 우리 팀만 문정동 사무실에 있었는데 상무와 팀장인 나를 제외하고 세명이 더 있었다. 한 명은 영업직이라 사무실에서 자주 얼굴을 볼 수 없었고 다른 두 명은 모두 이십 대 미혼 여성이었다. 기왕 함께 일하는 거 재미있게 일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모두들 모든 일에 시큰둥했다. 그들은 매일 활력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맥 빠진 얼굴로 출근해서 하루 종일 무표정 일색으로 근무했다. 사무실 안은 늘 쥐 죽은 듯 조용했고 2미터 내에 옹기종기 앉아있으면서도 모든 대화는 메신저를 통해서 했다. 

 

나를 면접하고 고용했던 상무는 돌쟁이 아들을 둔 것으로 봐서 아무리 결혼을 늦게 했다 쳐도 나보다 나이가 어린 것 같았는데 화장품 업계에 오래 있어서 본인 능력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했다. 틈만 나면 이전 회사에서 이룬 업적들을 보란 듯이 자랑하고는 했는데 얼마나 자주 반복되었는지 나중에는 대략의 내용을 내가 대신 읊을 수도 있을 정도였다. 그래도 나는 매번 들을 때마다 "와 상무님 대단하십니다."와 같은 감탄사를 잊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알랑거림을 잘하는 사람인지 이때 처음 알았다. 

 

그래도 출근길은 상쾌했다. 출근하는 수많은 인파 대열에 끼어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해야 했기에 발이 편한 운동화와 구두도 새로 장만했고 오피스룩을 완성시켜줄 새 옷도 몇 벌 질렀다. 날이 갈수록 나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졌고 어느새 그 많은 인파들 속에서도 더 날렵하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어떤 날은 출근길에 테이크아웃 한 핫티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모니터를 켰는데 가슴 한편에서부터 아주 묵직한 뿌듯함이 밀려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점심시간도 제법 기대되는 시간이었다. 지정된 한식 뷔페 스타일의 식당이었는데 나는 상무와 여직원 한 명과 같이 점심을 먹었다. 함께 먹는 20대 여직원은 맛도 별로고 자주 같은 메뉴가 나온다며 투덜거렸지만 솔직히 나는 나쁘지 않았다. 매일 남이 해주는 밥을 먹을 수 있는데 나쁠 것이 없었다. "오늘 메뉴는 뭘까?"하고 기대하는 편이 집에서 "오늘 뭐해먹지?" 하는 것보다 백배는 더 설레는 일이었다. 물론 별로 안 친한 셋이서 식사를 하는 것은 조금 불편한 일이었다. 식사 속도로 적당히 맞춰야 하고 별로 관심 없는 이야기도 듣는 척해야 했지만 나는 크게 스트레스 받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면 우리는 각자 헤어져 알아서 점심시간을 알뜰히 채우고 돌아왔다. 

 

다른 20대 여직원은 우리와 함께 점심을 먹지 않았다. 몇 번 같이 가자고 물어보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이유가 달랐지만 주로 다이어트 중이라 1일 1식을 하기 때문에 점심은 먹지 않는다고 했다. 처음에는 곧이곧대로 그 말을 믿었는데 집에 와서 남편에게 이야기했더니 다른 사람과 같이 먹기 싫어서 그런 것이라고 했다. 정말 며칠 후 우연히 본 그녀의 쓰레기통에는 간식 비닐봉지가 수북이 쌓여있었다. 탕비실에 구비해둔 초콜릿과 비스킷들이 금방금방 줄어든다 싶더니만...... 

 

본사에 계신 사장님은 근무 시작하고 딱 한번 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 그는 마세라티를 타고 다녔지만 돈이 없다며 광고비에는 매우 인색하셨다. 온라인 사업부는 광고하는 것이 주 업무인데 돈은 쓰지 말라고 하니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아 매번 기운이 빠졌다. 처음 인사하는 자리에서 별로 비싸지 않은 점심을 사주시며 이 세상에 가족 같은 회사는 없으니 돈 많이 벌게 해 달라고 말씀하셨다. 맞는 말 쿨하게 하시는데 별로 멋은 없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사장님을 다시 만날 일이 없었기에 그 외에 다른 기억이 없는 게 아쉽다. 

 

가끔씩 사무실로 출근해서 호탕하게 웃던 영업직원이 어느 날 갑자기 우리끼리 회식을 하자며 날짜를 잡았지만 나는 그 회식에 가지 못한 채 회사를 떠났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봐도 그 짧은 직장 생활은 꽤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마음에 드는 월급도 아니었고, 거창한 회사도 아니었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근사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어쩌면 그 짧은 시간이 내게 처음이자 마지막 그리고 유일한 한국 직장생활로 남을지도 모르기에 나 스스로 더 특별하게 포장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시 취직을 하고 싶어 질까? 글쎄…... 아직은 그런 마음이 없지만 이제는 나를 고용할 회사도 없을 것 같긴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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