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어도 끝까지 멈추진 않았다
03/21/22  

러닝에 꽂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찬양하며 주변 친구들의 스마트폰에 모조리 러닝 앱을 깔게 만들고 칼럼에서도 몇 번이나 러닝을 언급했지만 정작 나는 한동안 열심히 뛰지 못했다. 사연 없는 집 없고, 핑계 없는 무덤 없으니 구구절절한 변명은 접어두기로 한다. 
 
하지만 여전히 내가 달리고 싶어 한다는 점은 달라지지 않았다. 오롯이 내 몸만 갖고서 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움직임이자 운동 달리기는 운동을 싫어하고 못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도 충분히 매력적인 종목이다. 최근 남편이 선물해줘서 읽게 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회고록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온통 러닝에 대한 이야기들인데 책을 읽다 보면 달리고 싶은 욕구가 마구 샘솟는다. 달리기를 좋아한다면 꼭 한번 읽어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나는 워낙 작가 하루키를 좋아하는데 책 속에 런린이의 마음을 파고드는 글귀들이 수두룩해서 추리고 추려 몇 가지만 공유해보겠다. 
- 아픔은 피할 수 없지만, 고통은 선택하기에 달렸다. 가령 달리면서 '아아, 힘들다! 이젠 안 되겠다'라고 생각했다 치면, '힘들다'라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이젠 안 되겠다'인지 어떤지는 어디까지나 본인이 결정하기 나름인 것이다.
- 레이스의 기록을 단축시키지 못한다 해도 그건 뭐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라는 생각을 달리면서 문득 한다. 나는 나름대로 나이를 먹었고, 시간은 정해진 만큼의 몫을 받아간다. 누구의 탓도 아니다. 그것이 게임의 법칙인 것이다.
- 되도록 긴 범위로 만사를 생각하고, 되도록 멀리 풍경을 보자고 마음에 새겨둔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장거리 러너인 것이다.
- 근육은 기억하고 인내한다. 어느 정도 향상도 된다. 그러나 타협은 하지 않는다. 융통성을 부리지도 않는다. ... 한계와 경향을 지닌 나의 육체인 것이다.
 
그리고 하루키는 책의 마무리에 자신의 묘비명에 새길 문구를 직접 선택할 수 있다면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고 써넣고 싶다고 말한다. 걷지 말고 달려야만 한다는 소리가 아니다. 달리기가 걷기보다 우월하다는 뜻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오래 달리기를 해본 사람이라면 굳이 마라톤 주자가 아니더라도 이 문장이 주는 큰 울림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숨이 턱밑까지 차오르고 온몸이 제멋대로 움직일 때, 오직 멈추고 싶다는 유혹만이 간절한 그 순간,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간다는 것의 의미를 말이다. 
 
하루키는 이런 말도 했다. "어떤 경우에는 시간을 들이는 것이 가장 가까운 지름길이 된다." 무슨 일이든지 너무 많은 시간을 쏟아부어야 하는 일이 생기면 어느새 마음이 조급해지고 초조해진다. 시간과 경험이 쌓여 지름길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은 자주 잊어버리며 사는 것 같다. 어찌 보면 슬픔과 고통도 매한가지가 아닐까...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슬픔도 시간을 들이다 보면 익숙해져서 덜 아프거나 아예 그것이 나와 하나가 될 수도 있겠지. 
 
3월 20일, 37회 LA 마라톤 대회가 개최된다. 마라톤을 11번이나 참가하신 아버지가 LA 마라톤도 몇 차례 완주하신 경험이 있긴 하지만 나와는 분명 상관없는 세계였다. 그런데 이번에 출전하는 러너 중에 아주 특별한 사람이 있다. 무려 2만 5천여 명의 러너들 중 한 명인 그녀는 특별한 목적을 갖고 대회 준비를 시작했다. 그녀는 하늘로 유학 간 내 아들을 기억하고 아들 잃은 엄마가 되어버린 나를 위로하기 위해 뛰겠다고 했다. 나의 슬픔을 위로하고 함께하겠다는 일념으로 지난 수개월간 달리고 또 달려준 그녀의 마음은 소중히 내 가슴에 새겨 두고두고 간직할 것이다. 행여 마음이 무너져 내리고 눈물을 참을 수 없는 날이 오면, 그녀의 마라톤 응원이 보약처럼 비타민처럼 내게 힘을 주고 나를 지켜줄 것이다. 
 
아주 오랜만에 아침 일찍 혼자 달리기 위해 집을 나섰다. 달리기 전 간단히 다리 스트레칭을 하고 스마트워치와 스마트폰의 러닝 앱을 켜 달리기 시작했다. 내 다리보다 빠른 비트의 음악이 무선 이어폰에서 흘러나온다. 오랜만이라 그런가 시작부터 숨이 차오르고 금세 땀이 흐르고 얼굴도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오랜만이니 이쯤에서 멈출까? 괜히 오늘 무리했다가 앞으로 일정에 차질이라도 생기는 거 아니야? 심박수가 너무 빠른 거 아니야? 이러다가 쓰러지는 건 아니겠지? 5분만 더 뛸까? 한 바퀴만 더 돌까? 고작 이런 생각들로만 30분을 채우며 달렸다. 몸 컨디션도 별로고 집에 돌아오니 할 일도 태산 같아 크게 한번 한숨을 내쉬어야 했지만 한결 개운했다. 나의 묘비에도 "적어도 끝까지 멈추진 않았다."정도는 새겨주어도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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