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와 영어 사이
04/23/18  

전화회사 at&t와 통화할 일이 있었다. 인터넷 업체를 바꾸기 위해서였다. 30여분 이상을 기다려 담당자와 어렵게 통화가 이루어졌으나 어카운트의 실소유자를 확인하는 과정에 문제가 생겼다.

 

 

영어가 서툰지라 한국어 서비스를 원한다고 했다. 또 기다리란다. 30분쯤 지났다. 인내심이 서서히 바닥이날 즈음 상냥한 목소리가 들린다. 한국말이다“. 안녕하세요?”“한 시간 기다렸습니다.”“아, 죄송합니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끓어오르던 화가 눈 녹듯이 사라져 버렸다. 용건을 얘기했다. 이것저것 몇 가지 질문으로 실제 등록된 사람임을 확인한 후에 일사천리로 일을 해결해 주었다. 이름이 무엇인가 물었다‘. 스테파니 김’이라고 한다.

 

 

기분이 좋아졌다. 즐거운 마음으로 일을 하고 있는데 한 통의 전화가 왔다. 뱅크오브아메리카란다. 할 말이 있어 전화를 걸었다며 우선 이 어카운트의 주인인지 확인하기 위해 몇 가지 질문을 하겠다고 했다. 그러라고 하자 소셜번호를 묻는다.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또, 한국어로 속 시원하게 대화를 하는 게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어를 잘 못하니 한국어 통역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십여 분 기다린 후에 통역이 나왔다. 짜증이 가득담긴 소리로 인사를 한다. at&t의 스테파니 김 씨와는 전혀 다르다. 은행직원은 공손하게 말하는 것 같은데 통역은 신경질적인 말투로 무례하게 말한다. 불쾌함이 머리끝까지 치민다.

 

 

참아가며 대화를 계속한다. 전화를 건 사람은 뱅크오브아메리카 직원이 분명했다. 납부한 돈이 내야 할액수보다 부족한 것을 알려주기 위해 전화했다고 한다. 지금 전화상으로 내거나 우편으로 보내도 되고, 인터넷으로 내도 좋다고 했다. 지금 내겠다고 하니 수표의 뱅크 라우팅 번호와 계좌번호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 과정을 통역해주는데 점점 더 기분이 나빠졌다. 통역은 불친절했다. 하기 싫은 일을 마지못해 하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미국 이민생활의 가장 큰 어려움은 뭐니 뭐니 해도 언어 문제일 것이다. 사는데 큰 문제없을 정도로 말하기와 글쓰기를 하는 사람들도 모국어를 사용하는 것처럼 영어가 완벽치 않은 데서 오는 불안감을 떨쳐 버릴 수 없다. 언어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난 뒤에 영어공부를 시도해 보곤 하지만, 아침에 일어나서 잘 때까지 한국어만 사용해도 큰 불편 없이 살 수 있다 보니 흐지부지 되어 버린다. 영어를 한국어처럼 구사하기가 요원해질 수밖에 없다.

 

 

언어가 불편한 이민자들의 편리를 도모하기 위해 대기업들은 통역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그런데 통역이라는 것이 단순히 현지어를 모국어로 바꾸어 전달해주는 기능만을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언어의 의미전달 외에 양쪽의 감정이나 뉘앙스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면 통역을 매개로 한 대화가 방향을 잃어버린다.

 

 

통역에 의존해 의사를 표시해야 하는 사람은 통역이 자신의 뜻과 감정까지 다 표현해주기를 기대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통역자의 본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사람이 하는 일이다보니 통역자의 기분이나 컨디션에따라 달라질 수 있고 통역자의 능력도 천차만별이다. at&t에서 일하는 스테파니 김 같은 분도 있고, 뱅크오브아메리카의 피곤한 통역을 만나기도 한다.

 

 

1984년 한국 각지에서 선발한 중고등학교 학생들로 구성된 대원 19명을 인솔해서 스웨덴 잼버리에 다녀온 적이 있다. 캠프 통역관으로 미국인이 나왔다. 그가 하는 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말을 빨리 할 뿐더러 지독한 사투리를 쓰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을 통해 현지의 상황을 전달 받고 과정활동에 참여해야 하는데 심각한 문제였다. 본부 측에 통역관을 바꿔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폴란드 바르샤바대학 역사학과 3학년에 다니는 여학생이 왔다. 필자가 없어도 되었다. 대원들과 통역관이 척척 죽이 맞아 움직였다. 전 일정을 문제없이 마칠 수 있었다. 영어야 미국인이 더 완벽했겠지만 영어가 외국어인 폴란드인 통역이 소통의 문제를 더 정확히 이해하고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가장 훌륭한 통역은 중간에 통역자가 있다는 사실을 잊을 만큼 자연스럽고 불편 없이 대화가 이루어지는 상황을 만드는 사람이다. 미국에 사는 영어가 서툰 이민자들에게 통역 서비스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소통수단이다. 통역을 제공하는 시스템이 보다 더 확대되기를 바라고, 통역자들의 실력과 자질도 보강되고 개선되어 보다 더 양질의 서비스가 제공되기를 바란다.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