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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줌마 우정에 대하여
03/28/22  

십 대의 나는 친구가 없으면 못 살 거라 생각하며 살았다. 친구들과 영원히 변치 않을 우정을 맹세했고 친구는 내게 전부나 다름이 없었다. 친구가 원하면 내가 가진 전부를 (그 전부가 너무 미약했지만) 주어도 아깝지 않았고 친구와 함께라면 못 갈 곳이 없고 못 할 것이 없었다. 사랑을 버릴 망정 우정을 저버리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죄악과 같았다.  
 
그런 나에게 유안진 작가의 "지란지교를 꿈꾸며"라는 글은 성경과도 같았다.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잔을 마시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 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집 가까이에 있었으면 좋겠다
 
여기서 핵심은 "우리집 가까이"이다. 아무리 좋은 친구를 두었어도 우리집 가까이에 있지 않으면 차 한잔도 함께 하지 못하고 입은 옷 갈아입지 않고 찾아갈 수도 없다. 미국은 워낙에 땅덩어리가 넓은 나라이다 보니 그렇게 가까이에 친한 친구를 두는 일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가능하다. 지금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은 "당장 만나"하면 10분 내로 집합이 가능한 거리에 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허물없이 차 한잔도 가능하고 김치 냄새나는 옷을 입고 만날 수도 있다.
 
오늘 있었던 일 중 가장 즐거웠던 일은 오후 3시부터 4시까지 딱 한 시간 집 앞 카페에서 친구들과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온 일이다. 아, 작은 조각 떡도 2개 먹었다. 시간이 많지 않아 다들 서둘러 말을 했고 서너 차례 눈가에 주름이 질정도 웃었고 한 번은 배가 살짝 아플 만큼 웃었다. 그게 전부였지만 오늘 이 친구들을 만나지 않았다면 사실 이렇게 웃을 일이 전혀 없었다.
 
아이들은 학교와 학원으로 바빴고 나는 무료 체험으로 선정된 스킨케어 체험에 다녀왔고 오후에는 아이들과 수영 강습, 남편은 퇴근 후 짐에 들려 운동을 하고 집에 늦게 왔다. 그리고 잠시 후 씻고 잠자리에 들겠지. 그렇게 하루가 가는데 그나마 단 한 시간 친구를 만났을 때 나는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이 친구들을 만난 건 2018년 봄이었다. 셋째의 1학년 반 친구 엄마들이었고 공식적인 반 모임 후 내가 다섯 명만 따로 우리 집에 초대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어떤 근거로 추려진 정예의 다섯인지는 잘 모른다. 그냥 적당히 대화에 호의적이고 표정이 밝고 편안한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렇게 나까지 우리 여섯은 그 후로 쭉 우정을 지켜오고 있다. 첫 2년은 정말 주 6회를 만나는 날도 있었다. 아침에 커피 마시고 같이 점심을 먹고 집에 가서 애들을 돌보다가 다시 저녁에 나와서 만나는 날도 있었다. 정말 이제 막 불붙은 뜨거운 연인처럼 안 보면 보고 싶고 궁금하고 함께 있으면 무엇을 하든 재미있고 신이 났다. 
 
그때 1학년이었던 셋째는 올해 5학년이 되었고 우리의 우정도 5년 차가 되었다. 여섯 아이들 모두가 잘 지내기는 하지만 우리처럼 죽고 못 사는 사이들은 아니다. 우리는 몇 차례 경험과 실패를 통해 언제부턴가 아이들을 빼고 우리끼리 만나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아이 친구 엄마로 만났을지 모르지만 이젠 정말 그냥 내 친구들이다.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늘 쓰이는 표현이고 전적으로 공감한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와 친구가 되지 않을뿐더러 내가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 점에서 우리들은 다른 듯 비슷하고 전혀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지만 많은 공감대를 갖고 있으며 서로를 위하지만 부담은 주지 않으려 하고 편한 사이지만 불필요한 선은 넘지 않으며 그 우정을 더욱 굳건히 하고 있다. 
 
중년이 되어 새롭게 누군가를 만나 진정한 우정을 맺는다는 것이 어렵다고들 말한다. 오랜 친구가 좋은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이지만 함께한 시간이 관계의 깊이와 비례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나의 모든 시간 속의 인연들이 특별하고 소중하지만 지금 나와 함께하는 사람에게 가장 집중할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갑자기 만나 차 한잔을 나누고 폭풍 수다를 떨고 헤어지지만 어렸을 때처럼 영원을 맹세하거나 베프, 절친, 절교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아무런 전략도 이익도 목적도 없이 그냥 함께 만나는 것이 좋고 서로가 행복하길 진심으로 바란다. 십 대에는 몰랐지만 마흔이 넘고 나니 알겠다. 친구는 그걸로 충분하다는 것을. 조바심 내지 않아도 친구는 나를 떠나지 않는다는 것을. 굳이 술잔 기울이며 의리를 부르짖지 않아도 이만하면 괜찮지 아니한가 아줌마들의 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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