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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각 스님
04/23/18  
바티칸 추문을 폭로한 두 권의 책이 발간되었다. 이탈리아 언론인인 지앙루이지 누치가 쓴‘사원의 상인들(Merchants in the Temple)’과 시사 잡지‘에스프레소’의 기자인 에밀리아노 피티팔디의‘탐욕(Avarice)’, 이 두권의 책은 베일에 싸인 교황청의 검은 거래들을 상세히 공개하고 있다. 책의 내용은 교황청 고위 성직자들의 부패 비리를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취임 후 교황청 행정기구 쿠리아(curia)의 개혁을 최우선으로 설정할 정도로 바티칸의 부패는 심각했다.
 
 
한국에서도 일부 성직자들의 호화로운 생활을 보도한 적이 있다. 교회나 사찰을 매매하고 있다면서 시가 3억 원에 달하는 스포츠카를 몰고 다니는 대형교회 목사와 고급 빌라에 살고 있는 성직자, 수십억 원을 호가하는 남양주의 전원주택에 살고 있는 재산가 종교인들, 수억 원에 달하는 목사의 연봉 등 성직자의 수입을 문제 삼기도 했다. 특히 많은 사람들은 세금을 내지 않는 종교인들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
 
 
대형 기업을 거느릴 정도로 부를 축적한 어느 교회는 장로들과 목사가 싸우고 있으며, 재산분쟁으로 부부가 다투고 있고, 부자간에 싸움을 그치지 않고 있다.
 
 
이런 보도를 접할 때마다 생각나는 장면이 있다.
학생들 몇이 강의실에 앉아 있었다. 이런 얘기 저런 얘기하다가 學僧들의 행동에 대해 비난하기 시작했다. 필자도 . 스님들이 학교까지 택시를 타고 올라와서 내리는 것이 보기 흉하다고 한 마디 했다. 다른 학생들도 스님들이 시줏돈 받아서 택시 타고 다녀서야 되겠냐는 등 맞장구를 쳤다. 그러다 목사와 신부들에 대한 비난으로 확대되고 모든 종교를 성토하기 시작했다. 이때 구석에 앉아 있던 한 여학생이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강의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택시를 탈 수도 있지 않은가. 그리고 일부 종교인들의 행동에 대해 종교 전체를 싸잡아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일부 종교인들의 행동이 잘못되었을지라도 종교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평소에 말이 없고 잘 어울리지 않는 여학생이 한 마디 하자 학생들은 입을 다물었다. 머리를 길게 길러 단정히 묶고 언제나 깨끗한 옷차림을 하고 다녔다. 약간 촌스럽지만 무언가 함부로 접할 수 없는 위엄이 있었다.
 
 
몇 해 뒤에 우연히 다시 만났을 때 그 여학생은 회색 승복을 입고 바랑을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이분이 바로 중앙승가대학 교수인 본각 스님이다.
 
 
세상에는 피할 수 없는 것, 즉 불가피한 것들이 있다. 강의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택시를 타고 등교했던 학승들도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을지 모른다. 물론 조금 더 일찍 일어나 등교 준비를 했었더라면 택시를 타고 등교하는 것에 대한 불편한 시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지 않았겠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그 또한 우리가 알 수 없었던 불가피함 때문에 그럴 수 없었을 수도 있다.
 
 
종교의 지도자들도 사람인지라 사람의 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들을 존경하는 것은 비록 그들이 우리와 같이 사람의 일로 유혹을 당할 때에도 우리와는 다른 결정과 행동으로 참된 가치를 부르짖었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 불의한 행위를 해 놓고 불가피했다고 항변한다면 코웃음 한 번 치고 넘어갈 일도 종교지도자들의 같은 행위에 대해서는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그들이 지켜야만 하는 의로움의 보루가 무너졌다는 절망감 때문일지도 모른다.
 
 
물론 불의한 소수를 보고 그들이 속한 집단 모두를 불의한 것으로 여기는 일반화의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같은 의미로 소수의 잘못됨 때문에 그렇지 않은 다수가 손가락질을 받아서도 안 된다. 하지만 불의한 종교지도자들이 극소수에 불과하더라도 우리가 분노하는 것은 그들의 입과 몸짓에서 위안을 얻었을 신자들의 배신감과 절망감을 함께 느끼기 때문이 아닐까.
 
 
얼마 전 본각 스님의 소식을 접하며“일부 종교인들의 행동이 잘못되었을지라도 종교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는 대학생 시절 그분의 말씀이 떠오른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 말씀이 종교라는 이름의 옷이 불의한 일부 종교지도자들의 행위를 가려주는 도구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 옷은 가난한 사람들,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 사회의 약자로 불리는 사람들, 남을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는 옷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머리를 빡빡 깎은 채 노년에 접어든 본각 스님이 긴 머리를 단정하게 묶고 다니던 대학생 시절의 그 본각 스님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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