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고니오에서
05/02/22  

친구와 함께 워터라인 트레일을 걸었다. 산골고니오 마운틴(San Gorgonio Mountain)의 여러 코스 중의 하나로 한인들도 많이 찾는 사우즈 퍼크(South Fork) 트레일과 만나는 코스다. 이름 그대로 물길 따라 난 산길을 오른다. 80년대 중반 홍수와 산사태로 산길과 물길이 뒤바뀔 정도의 지형 변화가 일어나 일반인들의 입산이 허용되지 않았던 곳이다. 20여 년이 지나 파괴되었던 자연 생태계가 어느 정도 복원되었으나 레인저들이 이용할 뿐 여전히 일반인들에게는 공개되지 않았었다. 그런데 2015년 4월 Lake Fire로 명명된 대형 산불로 산림이 크게 훼손되어 수많은 거목들이 다 타버렸고, 워터라인 트레일뿐만 아니라 산골고니오 마운틴 전체가 폐쇄되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나 2017년 4월 오픈되었다. 오픈하는 그날 산을 찾았었다. 그때 검게 타버린 산림을 보며 가슴이 아팠고,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걸었던 기억이 났다. 친구에게 그때의 심정과 예전에 나를 교육하던 선배 레인저들과 이 트레일을 오르며 있었던 일화들을 들려주며 산길을 올랐다.
 
입구부터 화마가 쓸고 간 흔적이 아직도 도처에 남아 있었다. 세 종류의 나무가 거기 있었다. 통째로 불에 타 생명을 잃었지만 검은 모습으로 서있는 나무, 탔으나 재가 되지는 않은 채 검은 모습으로 누워 있는 나무, 그리고 아랫부분은 불에 탔지만 윗부분은 아직도 살아 생명을 유지하고 그 푸름을 자랑하는 나무.
 
친구는 길을 막고 있는 나무들을 들어 올려 길가로 치우는 작업을 계속하며 걸었다. 걷다보니 길이 보이지 않았다. 아직도 이곳은 일반인들의 입산이 허용되지 않아 풀들이 길게 자라 길을 덮어 버린 까닭이다. 하지만 레인저 활동을 하며 수십 번도 더 오른 길이다. 지형지물을 가만히 살펴보니 소나무 두 그루가 눈에 들어온다. 그 사이로 길이 있다. 두 나무 사이에 서서 사진을 찍은 적도 있다. 좀 더 걷기로 했다.
 
12시 40분, 식사하기 좋은 자리를 찾아 버너와 코펠을 꺼내고 물을 끓였다. 라면을 넣기만 하면 됐다. 그러나 배낭을 아무리 뒤져도 라면은 없었다. 라면을 넣었다고 생각하고 배낭을 들고 온 것이다. 친구와 끓인 물을 나누어 마시며 한참을 웃었다. 친구는 좀 더 올라가기를 원하는 눈치였지만 식사를 거르고 허기진 상태에서 산을 오르는 것은 무모한 행동이다. 더군다나 한 움큼의 식량도 없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하산하기로 했다. 산을 내려오며 잿더미에서 다시 조금씩 초록을 피워내는 숲을 보니 그날이 떠올랐다.
 
30년 전 4월 29일, LA 한인타운이 화염에 휩싸였다. 폭도들은 한인 상가에 침입해 약탈과 방화를 자행했다. 경찰이 백인 거주지역 위주로 경비에 힘을 쏟는 바람에 한인타운은 폭도들에게 좋은 약탈 대상이 되었다. 이에 한인들은 자경단을 조직해 한인타운을 지켰지만 한인 이민자들의 피와 땀이 밴 상가와 건물 상당수는 이미 폐허로 변한 후였다. 한인들은 망연자실했다. 원상복구는 엄두를 내기조차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우리들은 다시 일어섰다.
 
30년이 흐른 지금의 LA 한인타운의 모습은 30년 전 그날의 모습을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발전했다. LA 경제 활동의 상당 부분이 한인타운에서 이뤄지고 있고, 한인 업소는 타인종들로 넘쳐난다. 그들은 선진국으로 발돋움한 한국 문화를 즐기며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그날 이후 우리 한인들은 정치력 신장에도 힘쓴 결과 4명의 한인 연방 하원의원을 탄생시켰고, 캘리포니아 주하원의원, LA 시의원 등 많은 정치인들도 배출했다. 날이 갈수록 한인들의 위상은 높아가고, 그런 만큼 우리의 자긍심도 커졌다.
그렇다고 지금의 상태로 안주하려 해서는 안 된다. 또 식량 없이 산에 오르는 것처럼 무모한 도전을 감행해서도 안 된다. 안주는 나태를 불러 퇴행으로 이어지고, 무모한 도전은 파멸을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길을 잃은 상황에서 주변을 살펴 길을 찾은 것처럼, 평소 길을 걸으면서도 길 잃었을 때를 대비해야 한다. 그리고 걷고 있는 길을 막는 장애물들이 있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치우면서 걸어야 한다. 그래야 훗날 그 길 따라 걷는 우리 후손들이 더 쉽고 빠르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
 
그날의 아픔을 이겨내고 더 크게 성장한 한인 커뮤니티처럼 산골고니오 숲도 더 푸르고 울창한 야생의 모습을 회복하는 그날이 찾아올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안창해. 타운뉴스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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