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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김태리 나이에는
05/09/22  

2022년 나의 봄은 지난달 종영한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와 함께 시작되었다. 드라마는 마흔 넘은 내가 보기에 지나치게 청량하고 발랄한 청춘들의 방황과 성장을 담은 로맨스였지만 그래도 나의 감수성이 아주 메마르진 않았는지 주인공과 혼연일체가 되어 함께 설레는 봄을 맞이했다.
 
극중에서 여자 주인공 나희도를 연기한 배우 김태리는 90년생으로 무려 서른두 살의 나이로 고등학생을 연기했다. 하지만 드라마 후반부에 김태리가 성인이 된 나희도를 연기할 때 더 어색해 보였을 정도로 그녀는 고등학생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했다. 생기 넘치고 발랄한 그녀를 보면서 나의 서른둘을 떠올려 보았다.
 
나는 그때도 애가 셋이었다. 화들짝 놀라 “어머어머 난 김태리 나이에 애가 셋이었어”했더니 남편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아이고 안유진 참 열심히 살았네!”하는데 괜스레 눈물이 핑 돌았다. "자기도 마찬가지네!"라고 말한 후 눈길을 피하고 잠시 과거로 돌아갔다.
 
그래, 그때 우리는 참 열심히 살았다. 이십 대 후반 첫 아이가 태어나고 방 2개짜리 아파트에서 홀엄마와 밤새 우는 갓난아이와 넷이 함께 사는 일이 참 고되다는 것을 알게 되자 우리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덜컥 집을 사게 된다. 집을 사기 전에 성당에서 만나 알고 지내던 부동산 중개인과 은행장에게 조언을 구했는데 모두 다 하나같이 왜 지금 집을 살려고 하냐며 만류했다. 지금 우리 형편에 은행 융자를 얻어 무리하게 집을 구매하는 것보다는 아직 젊으니 몇 년 더 렌트를 하다가 집을 사는 것이 좋겠다고 진심 어린 조언을 해주신 것이다. 그들은 좋은 분들이었고 그때 내게 했던 말은 백 번 옳은 말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 눈에 뭐가 씌었는지 전문가들의 조언도 무시한 채 우리는 집 구매를 강행했다. 그때 남편은 대학원생이었고 나는 별 볼 일 없는 월급쟁이에다가 수중에 모아놓은 돈도 거의 없었다. 순식간에 무엇에 홀린 듯 최소한의 다운페이만 하고 어찌어찌 집을 사긴 했는데 그 다음이 더 문제였다. 집을 구매하기 위해 은행 융자를 받았고 매달 그 돈을 갚느라 빚쟁이에게 쫓기는 압박을 난생처음 경험하게 된 것이다. 은행에서 돈이 빠지는 날이 다가오면 자다가도 눈이 번쩍 떠졌고 그러면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밤낮없이 일했고 부업도 했고 수첩에는 어떻게 돈을 만들어 메꿀지 계획들이 빼곡했다.
 
어쩌다가 그 시절 사진을 찾아보면 올망졸망 귀여운 아이들 뒤로 언제나 피곤에 찌든 내가 보인다. 대부분의 사진 속에 나는 아이를 안고 있거나 잡으러 가고 있지 않으면 넋이 나가 있거나 초췌하기 그지없다. 그때 이렇게 막고 저렇게 막으며 버티고 지켜낸 그 집에서 우리는 아이를 셋이나 더 낳았고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살았다. 그리고 지금 그 집은 우리 모두에게 그리움이 가득한 돌아가고픈 고향집처럼 남아있다. 우리 아이들의 꿈은 다시 그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서른두 살, 김태리 나이에 나는 생기발랄하지도 눈부시지도 못했다. 초췌한 얼굴로 하루하루 정신없이 아이들 육아에 매진하고 생계를 위해 치열하게 버티느라 서른두 살도 참 좋은 때라는 것을 미처 깨달을 틈도 없었던 것 같다. 벌써 십 년이 훌쩍 넘어버렸지만 이제라도 서른두 살에 우리에게 돌아가 수고했다고, 잘 버텨서 장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때 우리의 결정들이 모두 옳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가 내린 선택과 처한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했던 것만은 인정해줘도 괜찮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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