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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마저
05/16/22  

며칠 전 친구들과 오랜만에 산에 올랐다. 지난 2월 눈 덮인 계방산에서 상고대를 보고 온 이후로 처음이었다. 초보들도 쉽게 오른다는 청계산이었지만 이날따라 오르막이 어찌나 고되던지 얼른 이 고생을 끝내고만 싶었다. 얼른 내려가서 미리 골라둔 식당에서 시원한 막걸리 한 잔 했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생각만 굴뚝같았다. 내려오는 길에는 다리가 후들거리고 무릎이 아프다며 속도를 내지 못하는 친구들을 재촉했다. 그리고 설레는 마음으로 들어간 청계산 유명 맛집에서 보쌈과 도토리 파전을 주문했고 한 잔씩만 마시자던 막걸리병은 계속 늘어났다.
 
특별히 가리는 술이 없는 편이지만 굳이 꼽으라면 나의 가장 덜 좋아하는 least favorite 술은 막걸리다. 나는 막걸리를 좋아해 본 적이 없다. 막걸리를 꼭 마셔야 한다면 마실 수는 있었지만 굳이 막걸리를 내 돈 주고 마셔 본 적은 없었다. 한창 술을 많이 마셨던 20대 때 주로 맥주나 소주를 마셨고 어쩌다 마신 동동주나 막걸리에 대한 기억이 별로여서 찾지 않는 술이 된 것 같다. 
 
그런데 작년에 남편과 남편 친구와 청계산에 갔다가 내려와서 마신 막걸리로 뒤늦게 막걸리 세계에 입문하게 된다. 막걸리에 대한 선입견이 있었기에 살짝 긴장하며 한 모금했는데 걸쭉하고 시큼할 줄로만 알았던 막걸리가 적당한 탄산에 달짝지근하고 어찌나 시원하던지 머리 위에 전구가 탁하고 켜지는 것만 같았다. 청량함이 입안에서 사정없이 물총을 발사하다가 목구멍으로 넘어갈 때는 구수한 향이 번졌다. 그때 마신 막걸리가 지평막걸리였고 그것만 입에 맞는 줄 알았는데 웬걸 그 이후로 마신 가평 잣 막걸리, 장수막걸리, 최근 청와대 만찬주로 유명하다면서 친구가 사다 준 대강 소백산 생막걸리도 모두 다 맛이 기가 막혔다. 
 
막걸리의 어원은 마구 거른 술에서 나왔다고 한다. 곡물을 발효시켜 만드는 우리나라 전통주로 술이 익으면 맑은술이 위에 뜨는데 맑은술은 걸러내어 청주가 되고 나머지는 섞어서 막걸리가 된다. 가격이 저렴해서 서민들의 술로 자리 잡았지만 이제 막걸리도 변화를 거듭하고 있어서 와인이나 샴페인처럼 고급스럽게 출시되기도 한다. 마케팅 효과가 있는 것인지 막걸리를 즐기는 인구도 점점 젊어지고 있다고 하니 그것도 반가운 소식이다. 
 
대게들 막걸리는 공식처럼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파전과 함께 먹어야 제맛이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 막걸리는 반드시 땀을 흘린 후 마셔야 더 맛있게 마실 수 있다. 물론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나의 경험상 비 오는 날보다는 맑고 더운 날이 더 적당하다. 그래서 농사철 농두렁에서 새참과 함께 마시고 등산 다녀온 등산객들이 땀을 식히며 찾는 술이 막걸리일 것이다. 비 오듯이 흘러내린 땀과 성취감이 막걸리를 만났을 때 비로소 "아~ 행복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청량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맥주도 있지만 맥주는 뭔가 좀 가볍다고 해야 할까? 맥주가 여름날 바비큐 파티나 해변에 누워 바다를 바라보며 마시기에 안성맞춤이라면 막걸리는 적당한 노동이나 운동으로 땀을 한 사발 흘린 후에 마셨을 때 훨씬 더 맛이 있다. 
 
작년부터는 산과 자연이 좋아져 등산과 러닝을 시작하더니 이제는 막걸리도 입에 맞는다. 함께 막걸리를 마신 친구들도 모두 그렇다고 한다. 막걸리 마시면 머리가 아프고 포만감이 심해서 그동안 멀리했다던 그들도 이젠 땀 흘린 뒤 마시는 막걸리 한 잔이 그렇게 맛있을 수 없다고들 한다. 더 이상 좋아하는 술이 늘어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점점 막걸리에 진심이 되어가고 있어서 큰일이다. 오늘 아침에 우연히 읽은 칼럼에서 어찌나 막걸리 소개를 맛깔스럽게 하던지 잠도 깨지 않은 비몽사몽 한 상태로 그만 3병을 주문해버렸다. 다음 주쯤 막걸리가 도착하면 막걸리가 좋아지기 시작했다는 친구들을 초대해 함께 즐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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