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05/23/22  

철저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날. 내 평생 이런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적어도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항상 내게는 보살펴야 할 사람들이 있었고 해야 할 일들이 있어서 하루도 오롯이 쉬어본 적이 없었다.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아픈 날도, 아이를 출산한 직후에도, 사랑하는 아들이 이 세상을 떠났을 때마저도 나에게는 해야 할 일들이 있었고 나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코로나 앞에서는 모든 것이 속수무책이었다. 코로나 휴가라는 게 있다더니 내게도 이런 날이 왔다.

"끝물이다. 조금만 더 버티자. 안 걸리고 넘어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게 나일지도 모른다." 하면서 가족과 친구들이 줄줄이 확진되는 동안에도 굳건히 코로나와의 전쟁을 2년 넘게 버텼다. 하지만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고 하더니만 결국 마지막까지 버티지는 못했다. 뒤늦게 빌어먹을 코로나19에 무릎을 꿇고 확진자 숫자에 기여하며 역사에 남게 된 것이다. 지난 수요일 함께 등산 다녀온 친구가 먼저 확진이 되었고 뒤이어 나도 확진이 되었다. 비염 때문에 아침마다 목이 칼칼한 편인데 이날은 칼칼한 목이 오후가 되어도 나아지지 않더니 밤이 되자 상태가 더 나빠졌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양성 판정을 받았고 나는 식구들과 격리되어 7일간 안방에 갇히게 된다.

확진을 확인하고 며칠 내에 엄청난 통증이 있을 거라고 경고들을 했지만 다행히 감기 정도의 통증 이외에 어마어마한 인후통, 고통스러운 침 삼킴, 잠을 설치게 한다는 기침도 입맛을 잃게 한다는 후각 상실 증상도 없었다. 다만 얼굴에 열감이 있고 매일 세 번씩 약을 먹어도 약간의 미열이 있고 콧물, 코막힘, 가래, 목이 불편한 정도로 일반 감기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방 안에 갇혀있다는 사실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얼마나 꿈꿔왔던가? 가족들의 삼시세끼 걱정할 필요 없이 혼자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는 자유를 그토록 염원했었다. 그러나 막상 그런 순간이 왔는데 그다지 신나지 않다. 휴식이라 하지만 결국 나는 격리 신세였기 때문이다. 내가 원해서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생활이 아니고 내가 원해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크게 다른 점이었다. 게다가 이틀 이상 집에만 있으면 견디지 못하는 나의 체질 때문에 더욱 답답함을 느꼈을 것이다.

오늘로 자가격리 6일 차, 지난 6일 동안 나는 미국 드라마 시즌 1개를 끝내고 한국 드라마 16부작 미니시리즈 2편과 영화 5 편을 끝냈다. 미니시리즈는 달달한 로맨틱 코미디 장르였는데 연이어 봐서 그런가 집중도 덜되고 재미와 감흥이 훨씬 덜했다. 8주에 걸쳐서 시청했어야 할 미니시리즈를 단 이틀 만에 해치우려니 드라마에서 나오는 주제곡이 돌림노래처럼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 같아 멀미가 났다. 그래도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하루 종일 TV 전원을 켜 두었다.

입맛이 없어서 격리 기간 중 살이 빠지는 사람들도 있다던데 나와는 무관한 이야기였다. 삼시세끼 남김없이 먹어치우며 침대 위에서 하루의 23시간을 보냈더니 순식간에 나도 확찐자가 되어가고 있다. 남편에게 밥을 너무 많이 퍼주지 말라고 툴툴거리면서도 넣어주는 모든 음식을 한 톨도 남기지 않고 다 먹는 중이다. 증상이 심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안도하면서도 식욕이 여전하다는 사실에 비관하는 중이다. 그러면서 사람이 움직이지 않고 먹기만 하는 것이 얼마나 심각하게 위험한 것인지를 몸소 체험하고 있다.

침대에 드러누워 드라마를 보며 친구들이 집 앞에 두고 간 맛있는 음식들을 먹는데 밖에서는 남편이 재택근무와 병행하며 내 대신 요리와 청소를 하고 분주하게 아이들을 돌보며 고군분투하는 소리가 고스란히 들렸다. 첫날은 걱정도 되고 살짝 불안하기도 했지만 이 방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이제 모두 내가 개입할 수 없는 일들이라 생각하고 어느 정도 자포자기하니 어느새 마음이 편안해졌다. 밖에서 아이들이 싸우고 남편의 언성이 높아져도 아이들이 숙제를 하든 학원을 시간 맞춰 가든 내가 간섭 할 바가 아니라고 내내 마음을 비우고 있었다. 문 하나 닫혀 있을 뿐인데 나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 있는 것 같았다.

이제 내일 하루만 더 버티면 격리가 끝난다. 꽤 지루하고 답답했지만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고 했던가? 누리자. 앞으로 당분간 이런 날은 쉽게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무조건 나만의 온전한 지금 이 휴가를 방해받지 않고 오롯이 즐기면 된다. 그리고 예상치 못했던 이 뜻밖의 휴가를 마치고 나가면 내 역할을 대신해준 가족들과 나를 걱정해주고 챙겨준 지인들을 온 마음으로 안아줄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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