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에서
06/06/22  

숲이 우거진 길을 걷는 것은 큰 행복이다. 누군가하고 함께 걸어도 좋고, 혼자라도 그 즐거움이 반감되지는 않는다. 누군가와 걸을 때는 함께하는 사람과 속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어 좋고, 함께 걷는 이가 없다면 나 자신과 평소보다 더 진실한 대화가 가능해서 좋다.

오늘 항공사에서 볼일을 봤다. 그러나 완전하게 해결하지 못하고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답답한 마음으로 전철역을 향해 가는데 눈앞에 덕수궁이 나타났다. 무조건 들어갔다.

덕수궁의 정문인 대한문은 공사 중이라 가려져 있었고, 대한문 옆에 조그만 길을 내어 관람객들을 출입하도록 하고 있었다. 광명문을 지나 중화문, 중화전을 거쳐 미술관으로 가기 전에 벤치에 앉아 분수를 바라보며 석조전을 바라보았다. 한가로운 풍경이었다. 석조전과 미술관 사이의 길을 걸어 후원(後苑)의 숲길로 들어섰다. 도심 한가운데 이렇게 잘 만들어진 푸른 숲이 있다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 숲길을 따라 걸었다. 쌍쌍이 걷는 사람들, 아이들과 걷는 엄마, 시원한 그늘에 앉아 담소를 나누는 중년의 여인들 모두들 평화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리 길지 않은 길을 잠시 걸었을 뿐인데 잔뜩 힘이 들어가 있던 눈빛은 온유해지고, 살벌하게 번뜩이던 언어는 부드러워지며, 불통의 관계도 쉽게 뚫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를 해결했지만 아직도 풀리지 않은 근원적인 문제로 답답했던 마음도 편안해졌다. 당장 죽어가는 생명도 내 품에 안으면 살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착각에 빠져들었다.

한국행 티켓을 마일리지를 사용하여 구입했다. 그리고 한국에 와서 돌아갈 항공권을 구입하려 하니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편도 요금이 거의 백만 원에 육박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90여만 원을 주고 구입했다. 그리고 출발일자를 앞당겨 보니 60여만 원이면 가능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날짜를 당기기로 하고 표를 구입했다. 그러나 이것이 나의 큰 실수였다. 항공권 가격이 60여만 원이 아니고 날짜 변경에 따른 추가요금이 60여만 원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항공회사에 전화하니 인터넷으로 수정하거나 취소할 수 없으니 자사로 와서 해결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오늘 항공사에 가서 취소하고 환불을 요청했다. 편도로 가면서 왕복요금에 해당하는 150여 만 원을 부담하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위약금 없이 환불이 가능하다는 직원의 답을 듣고 취소했다. 그리고 편도가 아닌 왕복 항공권을 구입하겠다며 가격이 얼마인가 물으니 내가 지정한 날짜의 항공권 가격이 260만 원 정도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인터넷으로 사면 더 싸게 구입할 수 있다고 했다. 비싼 가격에 구입한 표는 환불을 받고 계약을 파기했는데 돌아갈 표를 구입하지 못하고 나온 것이다.

마음이 편하지 않은 상태에서 덕수궁의 잘 가꾸어 놓은 숲길을 걸으며 근심걱정이 사라졌다.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생겼다. 이 무슨 조화란 말인가.

숲길은 길지 않았다. 정광헌에 이르러 숲길이 끝났다. 덕흥전, 함녕전, 석어당을 지나 죽조당, 준명당을 지나 다시 숲길을 만났다. 한 바퀴 돈 셈이다. 바로 그때 어린 학생들 대여섯 명 앞에서 열심히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있는 분을 만났다. 아이들은 장난을 치면서도 선생님의 얘기에 귀 기울이고 있었고, 선생님은 큰 목소리로 설명하고 바로 질문하는 방식으로 아이들이 집중하도록 노력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때 피난 갔다가 덕수궁으로 들어온 임금이 누구죠? 아이들이 크게 대답했다. 선조요. 그럼 왜 다른 궁궐로 가지 않고 덕수궁으로 왔나요? 궁궐들이 다 불에 탔기 때문에요.

덕수궁은 왜란을 피해 달아났다가 다시 돌아온 선조가 월산대군의 후손들이 살던 저택을 빌려 임시 궁궐로 삼으면서 정릉동 행궁이라 불렀다. 선조는 이 궁의 석어당에서 승하했고, 광해군은 즉조당에서 즉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광해군이 창덕궁으로 옮기면서 정릉동 행궁을 경운궁이라 칭했다

그 후 고종은 1897년 경운궁으로 돌아오면서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황제국의 위상에 맞게 여러 전각을 세우고 궁궐의 규모를 확대, 정비하였다. 1907년 일제의 강압으로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면서부터 경운궁은 지금의 이름인 덕수궁이 됐다.


고종은 1919년 승하할 때까지 덕수궁에서 지냈다. 고종 승하 이후 덕수궁은 일제에 의해 빠르게 해체되고 축소되었으나 최근 역사적 고증을 거쳐 하나하나 복원하고 있는 중이다. 또 새로운 단장을 거듭해 도심 속의 아름다운 공원으로 다시 태어났다.

아름다운 도심 숲과 비운의 역사. 이 어울리지 않는 두 가지 사실을 동시에 경험한 어린아이들은 훗날 오늘을 어떻게 기억할까? 대한민국을 이끄는 어른이 된 그들에게도 이 숲이 위로와 위안을 주는 속 깊은 친구가 되어 있기를 바라며 뜨거운 볕을 피해 숲속으로 다시 들어가 바람이 지나는 나무 그늘에 앉았다. 스프링클러에서 나오는 물방울이 바람 따라 날리고 있었다. 조국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6월이다.

안창해. 타운뉴스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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