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은 힘들어
04/23/18  

고교 시절 좋아하던 여학생이 대학생 선배와 어울려 다니는 걸 보고 혼자 속상해 하던 적이 있다. 함께 호떡을 먹으러 갔고 고속버스를 타고 인천에도 놀러갔었으니 당연히 그 여학생도 나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른 남자와 어울려 다니는 걸 봤으니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한동안 배신감에 시달렸다.

 

그때 한창 유행하던 노래는 내 마음을 그대로 표현해주었다.
“밤 깊은 골목길 그대 창문 앞 지날 때, 창문에 비치는 희미한 두 그림자, 그대는 나의 여인, 날 두고 누구와 사랑을 속삭이나...... 애타는 이 가슴 달랠 길 없어 복수에 불타는 마음만 가득 찼네”

 

그는 딜라일라, 그린그린그래스오브홈, 내 고향 충청도 등의 번안가요를 주로 불렀다. 번안가요가 아닌 것 가운데 대중에게 잘 알려진 그의 노래는 화개장터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재학중 아르바이트로 미8군 쇼단에서 노래를 부르다 1970년 번안곡 딜라일라로 가수로 데뷔했다. 성악을 전공한 그는 확 트인 목청으로 시원스럽게 노래를 불렀다.

 

 

여배우와 결혼해서 잘 사는가 싶더니 이혼했다는 소식이 들렸고 또 다시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가끔씩 별로 유쾌하지 않은 소식을 전하며 그의 존재를 알려오곤 했다. 그러다가 90년대 화투 그림을 그려 전시회를 한다고 했다. 화가라는 단어가 그의 이력에 추가됐다.

 

 

그는 방송에 출연해 거침없는 입담을 자랑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들추기 싫어하는 이야기들일지라도 주저하지 않고 여과 없이 토해내 듣는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도 했지만, 일부는 그런 그의 솔직한 이야기에 호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이 정도면 누구에 대한 이야기인지 모두들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바로 조영남이다. 그런데 그가 이번에는 대작(代作) 논란에 휩싸였다.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강원도 속초에 사는 한 주민이 자기가 아는 화가가 조영남의 그림을 대작해주고 있다고 제보했다. 이 사실이 한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각종 언론들이 경쟁적으로 보도했고 결국 검찰이 조사에 나섰다.

 

 

검찰의 조사 결과 2009년 이후 조영남이 발표한 작품의 대부분은 대작화가인 송기창의 손을 거쳤으며, 그 가운데 10여 점이 조영남의 명의로 판매됐다.

 

 

조영남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사실을 모두 인정했다. 검찰은 대작화가가 조영남의 작품 제작에 몇 %나 참여했으며 또 그런 그림이 몇 점이나 판매됐는가를 집중적으로 조사하고 있다. 조영남은 사기와 저작권법 위반 등의 혐의를 받고 있다.

 

 

조영남의 대작 의혹이 가라앉지 않자 예정됐던 전시회와 부산 콘서트가 취소됐다. 그리고 화개장터 옆에 위치한 조영남 갤러리 카페도 폐쇄 위기에 있다.

 

 

2012년, 조영남은‘겸손은 힘들어’라는 타이틀로 특별전을 열기도 했다. 이는 1991년도에 발표한 노래의 제목이기도 하다. 이 노래에는 다음과 같은 가사가 있다.“......나보다 잘난 사람 또 있을까. 나보다 멋진 사람 또 있을까. 겸손 하나 모자란 것 빼고는 내가 당대 제일이지. 겸손, 겸손은 힘들어......’
본인도 스스로도 자신에게 겸손이 부족하다는 것을 나름대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겸손이란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 무조건 자기 자신을 깎아 내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스스로를 낮추는 것이다. 그래서 겸손은 자신과 타인에 대한 존중의 의미를 담고 있다.

 

 

공자는“설사 천하에 둘도 없는 재주와 지식을 구비했다 하더라도 사람됨이 교만하고 인색하다면 그 밖의 것은 더 이상 볼 필요가 없다.”라고 말했다. 또“군자는 의로움을 바탕으로 삼고, 예로써 행하고, 겸손으로 표현하며 신의로써 완성한다.”고도 했다.

 

 

겸손과 교만은 동행할 수 없다. 그리고 교만은 우리 같은 범부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임에 틀림없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 자신을 낮추는 겸손의 미덕을 지닌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이 그린 그림을 자신의 것으로 속여 전시하거나 팔 수 없었을 것이다. 비록 그것이 관행이라고 할지라도.

 

 

겸손 하나 빼고는 자신이 당대 최고라고 노래하며 자신을 성찰했던 그였지만 오랜 시간이 흘러도 겸손할 수 없었던 것을 보면, 겸손은 그만큼 실행하기 어려운 삶의 가치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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