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폐인
04/23/18  

주말에 한가하게 쉬면서 TV를 보다가 드라마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국 드라마를 보았는데 곧 피곤해졌다. 한결같이 출생의 비밀, 연애와 결혼의 갈등, 재산싸움 등의 내용을 담고 있고, 등장인물들이 대화할 때 필요 이상으로 언성을 높이고 소리를 질러대 편안하게 보기 힘들었다.

 


아버지가 드라마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는지 아들이 ‘넷플릭스 (Netflix)’라는 미국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를 소개해주었다. 넷플릭스는 매월 일정액의 회비를 내고 시청한다. 미국은 물론 세계각국의 TV 프로그램과 영화들을 자유롭게 볼 수 있다. 첫 회부터 최종회까지 한꺼번에 볼 수 있어 더욱 편리하다. 월 10불만 내면 멀리 동부에 가 있는 막내아들과 중가주에 있는 셋째 딸이 같은 계정으로 공유할 수 있으므로 비싼 것도 아니었다. 아들이 가르쳐준대로 넷플릭스 웹사이트에 접속한 순간 일이 벌어졌다.

 

우선 그때 한창 화제가 되고 있던 미국 정치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즈 (House of Cards)’를 보기 시작했다. 워싱턴 정가와 백악관을 무대로 야망과 음모가 휘몰아치는 박진감있는 드라마였다. 첫 시즌에 13회 에피소드가 있었는데 첫 회를 보고나니 계속해서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앉은 자리에서 내리 4회까지 보았다. 다음날도 퇴근 후에 저녁을 먹고 보기 시작해 밤늦게까지 보았다. 그렇게 시즌 1을 사흘 만에 끝냈다. 풍문으로 듣기에 전직 대통령 부부 클린턴과 힐러리도 밤을 새며 이 드라마를 봤다고 한다. 새벽까지 보고나서‘한 편만 더 봅시다’라며 계속 봤다는 얘기다. 자신들이 몸담았던 세계의 드라마니 얼마나 더 재미있었을까.

 

 

‘하우스 오브 카즈’를 시즌 4까지 끝내고 다른 드라마를 찾아서 보기 시작했다. 브레이킹 배드(Breaking Bad), 블러드라인 (Bloodline), 프리즌 브레이크 (Prison Break), 마르코 폴로 (Marco Polo)등 미국드라마들을 시즌 별로 다 섭렵하고, 포일즈 워 (Foyle’s War), 닥터 마틴 (Doc Martin), 브로드처치 (Broadchurch), 킹 리차드 (King Richard) 등 영국 드라마들도 찾아 보았다. 이 무렵에 지인으로부터 미국드라마를 지칭하는‘미드’, 영국드라마를 가리키는‘영드’라는 신조어도 배웠다.

 

 

드라마가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밥을 먹으면서도 보고 심지어 밤을 꼬박 새면서도 봤다. 드라마 1회 분이 대략 50분 가량 되는데 보통 60여 회에 달한다. 시간으로 따지면 총 분량이 3000여 분, 대략 50시간이다. 계산상 쉬지 않고 본다면 이틀하고 2시간이면 된다. 하루 4시간씩 본다면 12일하고 2시간이 필요한 셈이다. 주말에 거의 외출을 하지 않고 본 탓에 일주일에 대략 드라마 한 편 정도를 마쳤다.

 

 

드라마에 빠져 지내는 동안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눈은 피로에 찌들어 침침해졌고, 머릿속도 맑지 않았다. 앉거나 누워서 보는 까닭에 운동이 부족한데다 드라마를 보면서 수시로 냉장고를 뒤져 먹고 마시다보니 배불뚝이가 되고 말았다. 거기에 마음 속에 꿈틀대는 죄의식까지.

 

 

‘이게 사람이 할 짓인가?’라는 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TV 앞에 죽치고 앉아 시간을 보내는 것은 생산적이지 못한 것이고, 생산적이지 못한 일을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란 교훈적 통념이 마음을 쿡쿡 찔렀다. 좋아하는 드라마를 보면서 즐기고 있는데 왜 죄책감이 든단 말인가?’‘욕망이 하고 싶어하는 대로 따라 해서는 안된다’라는 금욕주의적 규범이 슬그머니 머리 한 구석에서 잔소리를 하기도 했다. 뭐가 잘못 되었단 말인가? 평상시 일을 소홀히 한 것도 아니고, 드라마를 보다 망상에 젖어 정신나간 생각을 한 것도 아니다. 열심히 일하고 살면서 드라마까지 다 보려니 몸이 힘들어서 그렇지 잘못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드라마를 보면서 배운 것이 더 많다. 우선 영어공부를 실컷 했다. 한인사회에서 주로 활동하다보니 영어를 접할 기회가 드물었는데, 드라마 수십 편을 보다보니 듣기 훈련이 되어 어느 정도 듣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낯설게 느껴지던 미국인과 만나도 불편하지 않고 자연스럽다. 드라마에서 영어로 말하는 미국인이나 일상생활에서 영어로 말하는 미국인이나 똑같지 않은가? 또 미국의 문화와 미국인의 정서 및 심리도 더 많이 이해하게 되었다. 드라마의 어원은‘희곡’이다. 인간의 기쁨과 슬픔을 토대로 극을 꾸며 나가는 삶의 무대이다.‘미드’나‘영드’나‘한드’나 본질적으로 인간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단지, 취향의 문제가 있을 뿐이다.

 

 

필자는 계속 드라마를 볼 계획이다. TV 앞에 붙어 앉아‘소파감자 (Couch Potato)’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따위의 설교는 무시할 생각이다. 살아오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길들여진 시각으로 자신을 단죄하고 비난할 마음은 추호도 없다. 운동은 필요하니 좀 분발할 여지가 있다. 하지만, 좋아하는 드라마는 계속 볼 것이다. 땀흘려 일하고, 즐겁게 생활하며, 시간을 아끼고 쪼개가며 악착같이 보는 신종‘드라마 폐인’이 되어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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