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E 부녀
07/05/22  

친정아버지가 미국에서 오셨다. 매년 한 달쯤 한국 우리집을 방문하시는데 올해는 두 달째 머물고 계신다. 한국에 나오실 때마다 어찌나 공사다망하신지 매일 쉴 틈 없는 스케줄이 놀랍기만 하고 강화도, 당진, 동해, 경주, 춘양, 울릉도, 제주 등 동해 번쩍 서에 번쩍 열심히 다니시는 것도 참 대단하다. 하루에 두세 건씩 선약이 겹쳐 걸을 힘도 없다며 지친 모습으로 귀가하셨다가도 누군가에게서 연락이 오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벌떡 일어나 서둘러 나가시는 것이 20대 젊은이 저리 가라 수준이다.

MBTI는 성격 유형 검사의 일종으로 사람의 성격을 에너지의 방향, 정보수집, 판단과 결정, 이해 양식에 따라 16가지로 분류하는데 아버지는 보나마나 확실한 외향형(Extraversion)이다. 외향형(Extraversion, E)과 내향형(Introversion, I)은 자신의 에너지의 방향을 외부로 두는지, 내부로 두는지에 따라서 나뉘는데 쉽게 말해서 외향적인 사람은 사람을 만날 때 에너지를 얻고 내향적인 사람은 반대로 사람을 만나면 에너지가 소모되는 느낌을 받는다. 물론 E와 I가 언제나 흑백처럼 명확히 구분되지는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는 외향적인 E도 때로는 조용히 혼자 쉬면서 재충전하고 싶을 때가 있으며 혼자만의 시간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 내향적인 I도 가끔은 혼술보다 왁자지껄 회식 분위기를 즐기고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평생 "사교적"이라는 말을 들어온 전형적인 외향형 E로서 되돌아보건대 혼자였던 순간이 그리 많지 않았던 것만은 사실이다. 혼자가 좋아 혼자 떠난 한 달간의 유럽 배낭여행에서도 사실 나는 혼자였던 적이 거의 없었다. 혼자여서 오히려 더 자유롭게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과 친구가 되었다. 연애시절 남자 친구랑 싸웠을 때도 집에서 혼자 울기보다는 주로 친구를 만나러 나가는 쪽을 선택했다. 학창 시절에는 아무리 우울해도 학교에 가서 친구 얼굴을 보는 순간 미소가 흘러나왔다. 그래서 때로는 뭇사람들로부터 "숨기지 않아도 된다. 연기할 필요 없어."라는 말도 들어봤고 고1 때쯤 '진짜 나의 내면 깊은 곳에 그 무언가를 숨기고 즐거운 척, 신나는 척하고 있는 것인가'하고 꽤 진지하게 고민을 해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리 복잡한 인간이 아니었다. 나는 사람들 속에 있으면 즐거웠고 마음이 통하는 대화를 하고 나면 행복했고 그런 시간을 보내고 나면 가슴이 충만해졌다.

이렇듯 나도 꽤나 사람을 좋아하고 활동적이며 외향적인 인간이지만 아버지를 보고 있으면 나는 새 발의 피 수준임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 아버지는 늘 그룹에 중심이자 리더였으며 아버지를 주축으로 사람들이 모였다. 아버지가 그 어떤 인연도 허투루 여기는 것을 본 적이 없으며 나이, 성별, 인종, 지역, 종교 상관없이 수십여 년 지켜온 인연들은 동창, 동료, 선후배, 제자, 스승 등 그 관계도 참 다양했고 경이로울 정도로 끈끈했다.

얼마 전 남편이 스포츠센터에서 수영을 하는 동안 나는 야외 벤치에 앉아 휴대폰을 보며 남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옆 벤치에서 경비원들 몇 명이 모여 수박을 먹기 시작했고 그중 한 명이 내게 다가와 우리끼리만 먹기 미안하다며 꽤 커다란 수박 한쪽을 건넸다. 일부러 수고스럽게 내민 수박이기도 했고 나도 조금 전 5km 러닝을 마친 터라 매우 목이 말랐기 때문에 감사 인사를 하고 얼른 수박을 받아먹었다. "수영장 앞에서 경비 아저씨들 사이에 앉아 홀로 수박을 먹고 있었지 뭐야"하고 수영을 마치고 나온 남편에게 말했더니 그 아버지의 그 딸이라며 크게 웃었고 나도 따라 웃었다.

이 글을 쓰다 말고 궁금해져서 아버지께 물었더니 실제로 아버지는 MBTI 검사를 해본 적이 없다고 하셨다. 그래서 방금 약식으로 검사를 해보니 그 결과는 역시나였다. 우리는 부전여전 E 부녀였던 것이다. 아버지는 나에게 늘 좋은 본보기고 롤모델이기에 아버지처럼 즐거운 E로 나이들 수 있다면 나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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