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의 죽음
07/11/22  

8일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거리 유세 도중 피격 당한 후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숨을 거뒀다. 아베 전 총리는 8년 9개월, 일본 역사상 최장수 총리로 재임했다. '아베노믹스(아베+이코나믹스)'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질 정도로 장기 침체에 빠진 일본 경제 부흥에 공헌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편 외교 관계에 있어서는 미국, 대만과는 우호적이고 상호 협조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나 대한민국과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

10일 치르는 참의원 선거에 그의 사망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일본에서는 유력 정치인이 뜻하지 않게 숨을 거둔 뒤 이어지는 선거를 ‘도무라이 갓센'(弔い合戦)이라 부른다. 이는 '복수전'이라는 뜻이다. 타운뉴스 독자들이 이 글을 읽을 때쯤에는 이미 선거 결과가 알려진 뒤가 되겠지만 그 후 벌어질 상황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예측이 가능하다.

이번 선거는 아베 전 총리에 대한 추모 열기 속에 치러지는 선거이기에 그의 유지를 이어받는 쪽이 큰 승리를 거두게 되리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렇지 않아도 이번 선거에서는 자민당이 ‘사분오열’된 야당을 상대로 압승을 거둘 것으로 예측하던 상황이었다.

지난해 10월 취임 이후 아베 전 총리의 ‘강경 노선’에 눌려 있던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이번 선거의 승리를 통해 자신의 정책을 펴나가는 계기를 만들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저격 사태로 선거의 성격이 ‘기시다의 독립을 위한 싸움’이 아니라 ‘아베를 추모하는 싸움’이 되어 버렸다. 선거에서 크게 이기더라도 기시다 총리의 영향력이 줄고 아베의 유지를 계승해야 한다는 강경파들의 영향력이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아베 전 총리가 수장을 맡고 있는 아베파(세와정책연구회)는 전통적인 매파·보수 파벌로 당 내에서 가장 많은 현역의원 95명을 거느리고 있다.

강경파가 정국 주도권을 쥐게 되면, 개헌이나 외교안보 정책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아베 전 총리와 그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 등은 개헌을 자신들의 '필생의 과업이며, 염원'이라 했다. 기시다 총리는 개헌에는 동의하면서도 일본의 군대 보유와 교전권을 부정한 평화헌법의 핵심인 9조에 대해선 신중한 자세를 보여 왔다. 하지만, 이번 사태로 일본 정계의 분위기가 단숨에 개헌 쪽으로 휩쓸릴 가능성이 커졌다. 아베 전 총리가 재임하던 2018년, 자민당은 자위대의 존립근거를 삽입하는 내용의 개헌안을 발표한 바 있다.

아베의 사망으로 외교·안보 정책도 강경 노선으로 선회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자민당은 이번 선거 공약집에서 “나토가 국방 예산을 국내총생산(GDP)의 2% 이상 증액을 목표로 하는 것을 고려해 내년부터 ‘5년 이내’에 필요한 예산 수준의 달성을 추진한다”고 명시한 바 있다. 이 공약이 현실화되면 5년 후 일본의 방위예산은 10조엔(약 100조원)을 넘어 세계 3위 수준에 이르게 된다. 기시다 총리는 “방위비 증액에 숫자가 정해진 것은 아니다”는 식으로 말해왔지만, 여기서도 당내 강경파들의 주장에 밀리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미-일 협력이나 한-일 관계에도 적잖은 영향이 예상된다. 아베 전 총리는 2015년 4월 미-일 방위협력지침 등을 개정해 미-일 동맹을 강화했고, 2016년 현재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이 된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 구상’을 처음으로 제기한 바 있다. 최근에는 대만에 대한 중국의 군사적 위협을 제기하며 “대만 유사사태는 일본의 유사사태이고, 미-일 동맹의 유사사태”라는 인식을 거듭 밝혀왔다.
한국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2015년 8월 아베 담화를 통해 더 이상 역사 문제로 사죄할 뜻이 없다고 밝혔고, 그해 말 위안부 합의 후에는 합의에서 1㎜도 움직일 수 없다고 해왔다. 아베 전 총리의 사망으로 우익 강경론자들의 입김이 세어질 경우 일본과 관계 개선의 실마리를 잡아가려 했던 한국 정부에게는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오히려 아베의 빈자리를 대신하려는 세력들의 다툼으로 어떤 균열이 생길 경우, 뜻밖의 결과를 얻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우리 정부의 외교 정책에 기대를 걸어본다.

전혀 가능성이 없는 시나리오는 아니다. 집권 자민당 최대 파벌인 아베파는 아베를 대신해 구심력을 발휘할 후계자가 없는 상황이다. 아베의 사망으로 아베파의 힘이 약해지고 심지어 분열될 수도 있다. 이럴 경우 전통 온건파인 기시다파의 수장인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자신의 색깔을 낼 수 있을 거라는 분석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아베 전 총리 피격 현장에서 검거된 해상자위대 장교 출신의 범인은 범행 동기에 대해 "아베 전 총리에 불만이 있었고, 죽이려고 생각하고 노렸다", “특정 종교단체 간부를 노린 것이었다” 등 진술을 번복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일본 열도뿐만 아니라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이번 사건의 정확한 범행 동기는 물론 단독으로 저지른 범행인지, 배후에 다른 세력은 없는지 철저한 조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안창해. 타운뉴스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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