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날
04/23/18  

마켓 앞에서 예순은 넘고 칠십은 한참 안 돼 보이는 점잖은 부인이 반갑게 인사를 했다. 부인이 하는 인사의 정도로 봐서 가깝지는 않았어도 잘 알고 있었던 사이 같은데 누군지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살아오면서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을 일일이 다 기억해낼 수 없기에 그분 스스로 누구라고 밝히기를 기대하며 과거를 더듬었다. 이웃에 사는 사람? 한국학교 학부형? 제자라고 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아 보였다.

 

 

“저 모르시겠어요?”필자가 딱해 보였는지 한 마디 보태면서 손을 내밀었다.“글쎄요.”얼떨결에 손을 잡고 억지웃음만 짓고 있었다.

 

 

부인이 우아하게 웃으며 말했다.“성함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분명히 생각납니다.”‘아, 이름을 대면 나를 기억할 수 있겠다는 소리구나’이름 석 자를 말했다. 부인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플러밍 하시는 분이시죠?”“예? 아닌데요.”

아들로 보이는 한 젊은이가 손을 흔들며 소리를 내지 않고 입모양을 만들어 말했다.“그냥 가세요. 어머니 치매에요”

 

 

씁쓸한 기분이 되면서 십여 년 전에 알츠하이머 판정을 받은 대학 친구 얼굴이 떠올랐다. 한국에 갈 때마다 동창들 모임에 빠지지 않고 나오던 친구가 지난 번 고국 방문 시에 있었던 모임에 나오지 않아 마음에 걸렸었다. 친구가“서서히 나빠지는 병이니까 어느 날부터 모임에 빠지더라도 섭섭하게 여기지 말라.”고 만날 때마다 얘기했었지만 막상 안 보이니까 섭섭했었다.

 

 

여행에서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보니 친구가 두 번을 연달아 빠졌음을 알게 되었다. 친구에게 카톡을 보냈다. 며칠 뒤에 답이 왔다. 한국에 왔다 가면서 전화도 하지 않았냐면서‘죽은 사람 취급 하냐’고 거칠게 섭섭함을 토로했다.

 

 

며칠 전, 카톡으로 여기까지 얘기했던 그 친구가 생각나 집에 돌아오자마자 카톡을 다시 하려고 친구와 대화했던 방을 찾았다. 그러나 친구는 이미 대화방에서 나가고 없었다. 카톡 친구 명단에서도 없어져버렸다. 다른 동창생에게 사실을 전화로 알리고 연락을 해보라고 했다. 다음날 친구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 친구가 단단히 화가 나있다고 했다.

 

 

왜 그렇게 화가 난 것일까? 치매인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자가 진단표를 보고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치매환자는 대체적으로 화를 잘 낸다고 쓰여 있었다.

 

 

치매환자들을 주위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 2013년 한국의 보건 복지부 통계에 의하면 한국의 치매환자는 57만여 명이고 15분마다 1명씩 새로운 치매 환자가 발생하고 있다. 이 속도는 이미 고령화 사회에 진입한 유럽이나 일본보다도 빠른 편이다. 미국은 2008년에 이미 500만 명을 넘어섰고, 2050년에는 1,380만 명에 달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그 동안 치매를 나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남의 이야기로만 생각했으나 이제는 이웃의 일이요 나의 일이 되었다. 며칠 동안 치매에 관한 많은 글들을 읽었다.

 

 

무엇보다도 걸리지 않도록 노력하는 일이 우선되어야겠지만‘만일 치매에 걸렸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마음의 준비를 하게 되었다.

 

 

중증이 되기 전까지는 가족들과 함께 생활하지만 만일 증세가 심해진다면 식구들과 떨어져 사는 것이 좋을 듯하다. 전문 요양원에 살면서 가끔 식구들과 만나며 사는 편이 좋겠다. 요양시설에서 전혀 모르는 이들과 어울려 생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사는 게 편하다. 서로를 잘 아는 이들과 만나서 과거의 기억들을 더듬으며 살기 보다는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끼리 어울려 서로를 모르는 상태에서 사는 편이 더 행복하지 않겠는가?

 

 

잠시 밖으로 나왔다. 맑은 날이다. 감나무에 감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얼마 전까지도 작았던 열매들이 제법 영글어 가고 있었다. 한 여름의 뜨거운 태양 볕을 쐬면서 파란 열매들은 붉게 익어 가리라. 성급하게 떨어져 바닥에 뒹구는 것들도 있다. 그렇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자기의 의지대로 살아가지 못한다.

 

 

우리들과는 상관없이 우리들이 사는 세상은 언제나 아름답다. 아름다운 날이다.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