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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된 정수기
10/03/22  

우리 집은 식수로 사용할 물을 정수기를 통해 얻고 있다. 미국에서도 꽤 오랫동안 국산 브랜드 정수기를 사용해 왔고 한국에 정착하고도 정수된 냉온수를 바로바로 사용 가능하다는 점이 편리해서 계속 정수기 사용해 왔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정수기는 분기마다 담당 직원이(이분들을 코디라고 부른다) 우리집을 방문해 필터를 교체하고 기기를 점검해 준다. 코디는 한동안 수시로 바뀌더니 지금은 3년째 같은 분이 점검을 나오시고 있다. 오실 때마다 부엌에 있는 정수기 필터를 교체하고 내부 부품을 점검하시는데 은근 집에 찾아오는 손님처럼 느껴져서 신경이 쓰인다. 오늘도 아침 방문 예약이 잡혀 있었는데 나는 이른 시간부터 분주하게 부엌을 쓸고 닦고 해야 했다.

코디는 우리 정수기가 만 5년이 되어서 이제 기기를 소유하게 되었음을 알렸다. 하지만 기기 연식이 오래되었으니 새 제품으로 바꾸는 것이 좋겠다며 카탈로그를 슬며시 식탁에 올려놓으셨다. 5년 동안 야금야금 내던 돈을 이제야 내지 않고 오롯이 우리 기기가 되었는데 새로운 기기로 교체하라니 또 다른 페이먼트가 시작된다는 것이기도 해서 별로 달갑지 않았다. 그래서 잠시 차라리 정수기 없이 살아볼까도 생각해봤지만 식구가 적지도 않고 다섯인데 옛날처럼 보리차를 끓여 식혀 먹는 일도 보통일이 아니고 그렇다고 생수를 사다 나를 생각을 하니 그것도 만만치 않았다.

"정수기가 아직 별 문제없으니 그냥 쓰면 안 될까요?" 그랬더니 코디는 정수기 사용 3년이 지나면 기기가 제대로 작동을 안 할 수 있는데 벌써 5년이나 되었으니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많다며 매우 적극적으로 어필을 하셨다. 미국에서 사용했던 정수기도 10년 가까이 사용했지만 한 번도 문제가 생긴 적이 없던 터라 무슨 문제가 생긴다는 건지 궁금해서 물었다. 그랬더니 기기 겉면은 깨끗해 보이지만 내부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며 있다가 내부를 오픈하면 보여주시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잠시 후 부르셔서 가보니 정수기 내부에 부품 하나를 들고 계셨다. 그 부품이 세월이 지나면 부식되거나 변색될 수 있다고 설명하셨는데 슬쩍 보기에도 너무 멀쩡해 보였다. 그러자 코디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더니 "어... 고객님네가 유난히 깨끗하네요." 하셨다. 반짝반짝 빛나는 부품을 보며 서로 민망할 지경이라 나는 얼른 "매번 코디님께서 깨끗하게 관리해주셔서 그런가 봐요."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코디는 "지금은 괜찮지만 아마 곧 부식이 시작될 거예요." 하셨고 그러면 그때 부품을 교체할 수는 없느냐고 물었더니 가능하다고 했다. 지금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멀쩡한 정수기고 혹시라도 추후 문제가 발생한다 해도 간단한 부품 교체만으로 충분히 해결될 일을 미리 지레짐작하고 새로운 기기로 교체할 것을 제안하다니 뭔가 비합리적이고 억지스럽게 느껴졌다. 원래도 나는 세탁기, 전기밥솥, 냉장고, 텔레비전 등 내가 소유한 가전제품에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하거나 추가적인 필요가 없는 한 절대 새로운 제품을 구매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에 더욱 납득하기 어려웠던 것 같다. 무엇보다 내가 이런 영업을 달가워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손쉽게 거절할 자신이 없고 의외로 이런 영업에 거절하는 자체에 몹시 스트레스를 느끼기 때문인 것 같다. 

아무튼 아침 일찍 두 번째로 방문한 집에서 파이팅 넘치게 시도한 영업에 실패하셔서 기운이 빠지셨겠구나 살짝 죄송한 생각도 들었지만 한동안 나에게 영업하는 일은 없겠구나 싶어서 안도했다. 그리고 당분간 필터 교체와 점검 서비스만 유지하다가 새 제품이 필요하게 되면 연락을 드리겠다고도 말씀드렸다. 솔직히 멀쩡한 정수기를 바꿀 생각은 없지만 제빙 기능이 있는 얼음 정수기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하고 있었던 터였다. 

코디가 떠나고 나는 얼른 정수기로 시원한 물 한잔을 내려 마셨다. 아침 일찍부터 부지런히 집 청소를 하고 정수기 영업에서 버티느라 애를 썼더니(?) 목이 탔던 모양이다. 그리고 오후에는 정수기에서 나오는 뜨거운 물로 컵라면을 만들어 막내와 사이좋게 나누어 먹었다. 어느새 5년이나 흘렀지만 여전히 겉과 속이 깨끗한 정수기가 참 기특했던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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