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란 산불
04/23/18  

지난 7월 중순, 시카고 사는 친구 부부가 LA를 방문했다. 30 여년을 운영해 온 사업을 처분하고 한국으로 돌아가 살기로 했다며 그동안 바쁘게 사느라고 찾지 못했던 미국을 이곳저곳 돌아보는 중이라고 했다. 시카고 친구의 방문 소식을 듣고 LA 인근에 사는 친구들 십여 명이 모였다. 오랫동안 서로 연락도 없이 살아왔지만 모인지 몇 분 지나지 않아 어린 시절로 돌아갈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차를 마시기 시작할 때 필란 지역에 사는 친구가 시카고 부부에게 자기 집에서 이틀 정도 묵어가라고 권했다. 그러자 한 친구가‘그럼, 우리 모두 필란에서 한 번 더 모이자’고 했다.

 

 

친구집은 15번 북쪽으로 가다가 138번을 지난 후, 출구 두 개를 지나 내리는 곳에 있었다. 방이 6개나 되고 화장실이 7개나 되는 대저택이었다. 5에이커의 정원에는 정자를 3개나 지었고, 각종 나무들이 열심히 자라고 있었다. 200 그루를 심었다는데 워낙 넓다 보니 별로 표시도 나지 않았다.

 

 

집주인은 앞으로 일이 년 안에 이곳의 집과 농장을 처분하고 한국에서 노후를 보낼 계획이라면서 시카고 친구와 같은 생각을 피력했다.

 

 

친구는 해가 질 무렵 근처에 있는 자신의 농장으로 안내했다. 15번 남쪽으로 가다가 138번을 만나 우회전하여 잠시 달리니 오른쪽에 20에이커 농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

 

 

농장 안에 있는 주택에는 6가구가 입주해 살고 있었으며 교회 강당 같은 커다란 건축물이 완공을 앞두고 뒷마무리를 하고 있었다. 워낙 넓다 보니 한 바퀴 도는데 제법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날 그렇게 방문했던 바로 그 저택과 농장이 자리한 지역에 산불이 발생했다. 불탄 자동차 아래로 쇳물이 흘러나올 정도라 하니 불길의 강도를 짐작할 수 있겠다. 한인교회‘필랜가든처치’는 부속 12채 건물이 완전히 전소됐다.‘구름이 머무는 곳’,‘천스 배농장’등 30여 년 동안 이루어 온 카혼밸리 한인커뮤니티가 거의 모두 다 타버렸다. 화마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검은 재가 뒤덮고 있다.

 

 

이 소식을 듣고 걱정에 휩싸이게 되었다. 불과 한 달 전에 방문했던 친구의 농장이 화마가 소용돌이치는 한 가운데 있기 때문이었다. 전화를 걸어 피해 상황을 물어볼까, 아니면 좀 더 상황을 지켜 볼 것인가. 이틀간 속을 끓이다가 전화를 걸었다. 친구는 전화 건 사람의 의도를 짐작한 듯 자기 집과 농장에는 피해가 없음부터 알렸다. 아직도 138번 도로는 통행이 금지되어 있어 자신이 가서 보지는 못했지만 농장 안에 살고 있는 주민들과의 통화로 무사함을 알 수 있었다고 했다.

 

 

138번 도로를 따라 확산되던 불길이 차츰 소강상태라고는 하나 일부 지역은 짙은 재와 연기로 인해 마스크 없이는 호흡이 어려운 실정이다. 더욱이 강풍이 불어 잿더미가 사방으로 날아다녀 주민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한다.

 

 

수백 가구에 달하는 대피 주민들은 필란 사거리에 있는 맥도널드 등에 모여 피해상황과 산불 진화 소식을 교환하고 있으며, 적십자사에서 운영하는 헤스페리아 셸터로 이동했다가 친척이나 지인들 집으로 옮겨가거나 세컨드홈으로 임시 거처를 옮기고 있다.

 

 

6월부터 시작한 남가주의 산불은 현재 8곳에서 계속되고 있다. 그 중에서 15번 인근에서 발생한 블루컷 산불이 더욱 안타깝게 느껴지는 것은 한인들의 피해가 심하기 때문이다. 화마가 휩쓸고 간 필란 지역은 1990년대부터 한인들이 이주해 집을 짓고 밭을 갈고 씨 뿌리며 대추, 사과, 배, 매실 등의 과수를 심고, 꿀벌을 치고, 오리, 흑염소 등을 기르고 있는 대표적인 한인 집단 거주 농촌이다. 미국으로 이민와 농업을 생업으로 선택한 그들의 삶의 터전이다. 그런데 사막기후의 악조건 속에서 모래와 돌밭을 일구어 농경지로 가꾸어낸 그들의 피와 땀이 순식간에 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화마가 휩쓸고 간 뒤 잿더미로 변해버린 삶의 터전으로 돌아와 복구 작업을 시작할 지역 주민들에게 위로와 도움이 필요할 것이다. 특히 농업의 터전을 잃은 한인들을 위해서 한인 커뮤니티의 많은 단체들이 모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야 한다. 경제적인 도움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재능 있는 사람들이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한인들의 단합된 힘으로 미국 내 한인 농촌을 재건하고, 이번 산불을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아 더 큰 부흥의 도약대가 되도록 한인들의 역량을 결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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