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부샤부를 부르는 계절
10/10/22  

아침저녁으로 추워졌다. 그리고 아침 샤워 물 온도가 확연히 높아졌다. 이렇게 공기가 쌀쌀해지면 마치 뇌에 버튼이라도 눌러지는 것처럼 자동적으로 샤부샤부가 생각난다. 오늘 마침 친구들과 점심 약속이 있었고 메뉴를 샤부샤부로 정하고는 오랜만에 음식 생각에 마음이 설렜다. 

샤부샤부만큼 실패하기 힘든 음식도 있을까? 샤부샤부는 얇게 저민 소고기와 갖은 채소를 끓는 육수에 즉석에서 데쳐서 양념장에 찍어먹는 요리로 이름은 '찰랑찰랑', '살짝이'라는 일본어 의태어로 소고기를 육수에 담가 휘휘 저어 익히는 모습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샤부샤부의 가장 큰 매력은 싱싱한 채소와 소고기 혹은 해산물만 있다면 육수 없이 맹물에 넣고 먹어도 먹을 만하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내가 미국에서 처음 접한 식당의 샤부샤부는 딱 그렇게 나왔다. 개인 전기스토브가 있는 바에 빙 둘러앉으면 맹물이 담겨있는 냄비와 함께 채소와 소고기 접시가 나왔다. 원하는 식재료를 맹물에 담갔다가 익으면 알아서 건져 먹는 것인데 뭐든지 소스에 찍어 먹으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고기와 채소를 몇 번 끓이다 보면 저절로 훌륭한 육수가 만들어져서 나중에 그 육수에 국수를 넣어 먹는 것이 아주 별미였다. 암튼 음식 양이나 서비스에 비해 음식값이 꽤 비쌌었는데도 불구하고 항상 손님이 많아서 최대한 피크 시간을 피해서 몇 차례 방문했었고 갈 때마다 만족스럽게 먹었던 기억이 있다. 

한국에 온 이후에도 샤부샤부를 제법 먹었는데 동네 친구들과 자주 가는 곳이 있다. 점심에는 1인 11,000원만(최근 2천 원 인상되어 13,000원) 내면 소고기는 한 접시만 나오지만 그 외에 배추, 청경채, 팽이버섯, 숙주, 청경채, 국수 등은 무한 리필이 가능하다. 점심시간에는 늘 아줌마 손님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식당이다. 나는 채소를 싫어하는 편은 아니지만 채소만으로 포식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샤부샤부만은 예외다. 샤부샤부를 먹을 때만큼은 마치 코끼리라도 된 것처럼 어마어마한 양의 채소를 먹어치운다. 채소도 이 정도 먹으면 탈이 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고기와 채소만 건져 먹는 수준에서 끝나면 서운하지. 그랬다면 내가 샤부샤부를 그토록 사랑하진 않았을 것이다. 채소로 어느 정도 포만감이 들기 시작하면 본격적인 식사 시작이다. 진하게 우러나온 육수에 취향에 맞게 우동이나 칼국수 면, 소면을 넣어 먹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맛있어도 국수로만 배를 채워서는 안 된다. 마지막 코스로 죽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국수가 들어가서 더욱 걸쭉해진 육수를 조금만 남겨두고 밥 한 덩어리를 넣으면 굳이 야채나 김가루 등을 추가하지 않더라도 정말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죽이 완성된다. 욕심을 조금 내자면 계란과 참기름 정도만 추가하자. 

샤부샤부는 친구들과 외식 메뉴로도 좋지만 손님 초대 메뉴로도 탁월하다. 신선하고 푸짐한 식재료만 있다면 뛰어난 요리 솜씨가 없더라도 손쉽게 꽤 근사한 코스 식사를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반찬이 다양해도 밥과 반찬만 먹는 것과 달리 샤부샤부는 국수와 죽까지 연결될 경우 식사 시간이 한 시간 이상 소요되다 보니 적당히 대화도 하며 즐기기 아주 안성맞춤이다. 굳이 다양한 요리를 준비하지 않아도 단품으로 승부해도 충분히 훌륭하다. 

아... 다시 생각해도 샤부샤부는 얼마나 완벽한 음식이란 말인가? 우리나라 음식으로 전골이 비슷하긴 한데 전골은 재료를 미리 국물에 넣어두고 끓이다 보니 분명 다르다. 전골의 맛은 요리사 손에 달렸지만 샤부샤부는 먹는 각자가 취향껏 원하는 대로 조절하며 즐길 수 있어서 너무 좋다. 편식이 심하다고 눈치볼 필요도 없고 살짝만 익은 채소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고 육수의 농도나 간도 모두 내 마음대로 조절 가능하다. 그래서 주는 대로 차려진 음식을 먹는 것을 좋아하는 일부 사람들에게는 다소 번거로운 음식이기도 하다. 

이제 겉옷 없이 밖에 나가면 춥고 추워지면 국물이 당긴다. 이건 뭐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저절로 그렇게 된다. 그리고 샤부샤부는 이 계절 나에게 최고의 음식이다. 따끈하게 후후 불어가며 고기와 채소를 정신없이 건져 먹다 보면 어느새 추위는 다 잊고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다. 그러면 또 이렇게 가을이 오는구나... 하면서 온몸으로 가을을 맞아주는 것이다. 

여러분도 오늘 저녁 샤부샤부 어떤가요? 국수와 죽도 잊지 마세요.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