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야 1.5세 아줌마
홈으로 나는야 1.5세 아줌마
한라산, 나도 올랐다
10/31/22  

작년부터 등산을 시작했지만 서울 근교 산도 버거운 현실이라 한라산은 오를 생각도 못해봤다. 내게 한라산은 극히 일부 사람들만 오르는, 나와는 거리가 먼 그런 산이었다.  그런데 나를 등산으로 인도한 친구가 먼저 한라산 완등에 성공하면서 어쩌면 그때부터 '나도 머지않아 한라산에 오르게 되겠구나'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막연한 생각이 너무 빨리 현실로 다가온 것은 남편에게 갑자기 제주도 출장이 잡히면서부터였다. 아이들 없이 단 둘이 제주를 방문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어쩌면 다시 이런 기회는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마음먹었을 때 가야만 했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내 몸뚱이와 의지가 언제 또 내게 한라산을 허락해줄지 모른다.

그렇게 우리는 한라산을 오르고야 말았다. 모든 것은 매끄럽게 착착 진행되었다. 한라산 예약 시스템을 통해 사전 탐방 예약을 완료했고 예약 시 코스도 결정해야만 했는데 우리는 성판악으로 올라가 관음사로 내려오는 코스를 선택했다. 성판악 코스가 시간은 조금 더 걸리지만 완만해서 훨씬 수월하다고들 했고 주위 지인들도 대부분 성판악 왕복 코스를 선택했다. 관음사 코스에 힘든 구간이 많다고 하니 나 역시 겁이 나기도 했지만 무려 한라산씩이나 가는데 그 긴 길을 원점 회귀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고 두 코스를 다 가보고 싶은 욕심에 그렇게 진행했다.  

성판악 코스로 오르는 길은 다른 산과 비교했을 때 경사가 심하지 않고 산세도 험하지 않은 편이었으나 등산 시간이 길어지니 점차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특히 정상을 앞두고 오르는 끝없는 계단은 여러 번 나를 탄식하게 하였다. 하지만 한라산은 다르긴 달랐다. 해발고도가 높기 때문인가 서울 근처 산에서 볼 수 있는 녹색과는 다른 다양한 초록을 품고 있었다. 정상 가까이 올라갔을 때의 풍경은 그간의 고생을 한방에 날려 보내기 충분했다. 우리나라에 아름다운 산이 많다지만 이런 풍광은 반드시 한라산에서만 볼 수 있으리라... 

오르는 내내 다양한 사람들과 마주쳤지만 정상에 도착하니 무슨 사람이 그리 많은지 정상석 앞에서 사진 한 장 찍기 위해 한 시간 가량을 대기해야만 했다. 하지만 산에서 하는 사람 구경도 제법 흥미로웠다. 사람들도 제각각으로 다람쥐처럼 재빠른 초등학생, 속도는 다소 느리지만 꾸준한 중장년층, 일반 운동화 신고 겁도 없이 올라온 젊은이, 싱그러운 젊은 커플, 동유럽 쪽 언어를 구사하는 듯한 유럽인들 등등 연령, 성별, 인종이 참으로 다양했다. 한라산은 초등학생부터 노인까지 성한 다리만 갖고 있으면 누구나 올라갈 수 있는 완만한 산이라고 우습게 보는 사람들도 많지만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한라산을 완등 했다고 하나 백록담을 실제로 보지 못한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집 앞 사거리까지도 걸어 다니기 싫어하고 세 시간 등산에도 다리가 후들거리던 내가 백록담을 내려다보고 있다니 이 얼마나 대단한가? 

하지만 마냥 감격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자, 이제 내려가야만 한다. 올라온 코스보다 험하다는 관음사 코스, 그래도 내리막길로 2시간까지는 어떻게든 버티고 버텼다. 그런데 2시간을 넘어서며 정말 가도 가도 끝이 안 보이고 다리는 풀릴 대로 풀려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 속절없이 두 다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발목은 목각인형처럼 제멋대로 덜렁거렸고 왕자를 사랑해 인간의 두 다리를 얻은 인어공주처럼 한 발 한 발 디딜 때마다 발바닥, 종아리, 오금이 소름 끼칠 정도로 아파왔다. 특히 하산하는 내내 끊임없이 펼쳐졌던 한라산 현무암들은 등산화를 뚫어버릴 기세로 버티고 있었다. 이 지긋지긋한 돌길만 지나면 무조건 전속력으로 내려가리라 다짐도 해봤지만 야속하게도 내 두 다리는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왕복 8시간이 넘는 산행으로 속수무책으로 풀려버린 다리는 한라산에서 내려오고도 사흘이 지나도록 계속 그 상태였다. 작년 첫 등산 후 느꼈던 무시무시한 근육통과 비슷한데 발목 통증은 훨씬 심했다. 시커먼 현무암을 떠올리면 지금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정도랄까? 한라산 다녀온 지 며칠 되지 않았을 때 친구가 "한라산 완등 했으니 겨울에 한라산 눈 보러 같이 가야지?" 하는데 진저리를 치며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 지금 밤새 술 마시고 숙취로 쓰러져있는 친구한테 술 마시러 가자는 거랑 똑같은 거 알지?" 

한국에 오고 얼마 안 되어 제주 대표 소주라는 한라산을 마시고 어마어마하게 고생했던 기억 때문에 내 인생 최악의 술로 꼽으며 다시는 한라산 소주를 마시지 않았는데 한라산도 한 5년 끊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