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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살던 고향은
11/28/22  

나의 살던 고향은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꽃 동네 새 동네 나의 옛 고향

파란 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냇가에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미국에서 아버지, 오빠와 셋이 생활하던 시기가 있었다. 평생 요리라고는 해본 적 없던 아버지는 매일 우리를 먹인다고 밥을 안치고 버섯과 야채가 잔뜩 들어간 정체불명의 버섯국 같은 것도 끓이셨다. 우리는 원활한 살림 운영을 위해 정기적으로 가족회의를 했었는데 그때 회의의 마무리는 항상 홍난파 작곡의 "고향의 봄" 제창이었다. 아버지가 시키니 마지못해 불렀는데 노래를 부르고 있다 보면 가끔씩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꽃 피는 산골 고향을 가져본 적 없는 십 대 소녀였지만 내게도 그리운 고향은 있었던 모양이다. 

고향의 사전적 의미는 아래와 같다.  1.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곳 2.조상 대대로 살아온 곳 3.마음속에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

아마도 내게 부합되는 고향이란 바로 이 세 번째가 아닌가 싶다. 내가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이 아니다. 복숭아꽃, 살구꽃은 구경도 못해봤고 냇가에 수양버들도 그림책에서나 봤으려나......  나에게도 꿈에 그리는 상상 속의 고향이 있긴 하나 나는 대도시 아파트에서 자랐고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놀이터 미끄럼틀에서 탈출 놀이를 하고 아스팔트 바닥에서 롤러스케이트를 타며 자란 내게 시골 고향은 그저 로망일 뿐이다. 

그렇다. 내게는 돌아갈 시골 고향이 없다. 명절 때마다 귀향길이 막히는 걸 뉴스로 보면서 우리는 찾아가야 할 머나먼 고향이 없어서 다행이라고도 생각하지만 가끔 지방에 계신 부모님 댁을 찾아가는 친구들이 부러울 때도 있다. 부모님이 직접 농사 지었다며 시골에서 보내오는 온갖 식재료들도 탐나고 남들은 일부러 찾아가는 휴가지에 부모님 댁이 있다는 사실도 부럽고 무엇보다 "고향의 봄" 노래에 나오는 그런 풍경의 이상적인 고향 집이 있다는 사실이 가장 부럽다. 

그래서 나도 요즘 들어 부쩍 대도시가 아닌 한적한 어딘가에 찾아갈 집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당이 넓은 집에서 아이들은 층간 소음 걱정 없이 실컷 뛰어놀고 텃밭에서 흙 묻은 야채들을 맨손으로 수확하고 도시 생활이 답답하고 숨 막힐 때 찾아가 쉬고 올 수 있는 그런 곳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시댁은 우리 집에서 도보 8분 거리고 친정은 미국이고 양가 조부모님들은 모두 돌아가셨다. 그래서 갈 곳 없는 우리는 기회가 될 때마다 고향을 찾는 대신 여행을 떠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요즘에는 옛날처럼 서로의 고향을 묻는 일이 거의 없어졌지만 지금 누군가 내게 고향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미국이라고 대답할 것 같다. 미국에 사는 25년 동안은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살았던 곳을 고향으로 여기며 그리워했는데 그곳으로 돌아온 지금의 나에게 고향은 바로 미국이다. 특히 미국 추수감사절과 성탄절 무렵이 되면 부모님과 오랜 벗들이 남아있는 고향이 더욱 그리워진다. 추수감사절마다 부모님 집에서 허리띠 풀고 먹던 요리들도 그립고 자식들이 모두 떠난 후에도 아버지가 매년 준비하셨던 크리스마스트리도 그립다. 트리 앞에 앉아 모두 함께 가족사진을 찍던 그날은 얼마나 큰 축복이었던가? 고향은 돌아가고 싶은 곳, 돌아가고 싶은 순간을 품고 있기에 가슴 절절 그립고 또 그립다. 

우리 아이들은 "고향의 봄"을 부르며 어떤 고향을 떠올리게 될까? 일생이라고 해봤자 십 년 안팎인 그들에게도 고향은 미국, 우리 아이들이 나고 자란 정든 집이 있던 동네일 것이다. 실제로 아이들은 미국에서 우리가 살았던 집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나무테처럼 남겨진 아이들의 키 눈금이 남아있던 그 집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찌릿찌릿 아파온다. 지금이라도 만들어줄 수 있을까? 좋은 기억과 추억이 머무는 곳, 지치고 힘들 때 찾아와 쉴 수 있는 곳, 외로울 때 따스한 기억으로 떠오를 그런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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