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우동주(風雨同舟)
04/23/18  

오전 5시 50분. 한국에 도착했다. 하늘은 잔뜩 찌푸려 있었다. 동생이 마중 나왔다. 차 속에서 동생과 필자는 가족들의 근황을 묻고 형제들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작 미국을 출발할 때부터 궁금했던 이야기에 대해서는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마치 터부를 건드려서는 안된다는 사람들처럼.

 
목적지로 가는 도중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러 아침을 먹었다. 우리 옆에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며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여 보았지만 역시 그들도 궁금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선배와의 약속 장소로 가기 위해 승차한 택시 운전기사는 자신의 연애담을 늘어 놓았다.
선배는 지난 주에 있었던 딸의 결혼식과 동창회 소식을 장황하게 얘기했다. 저녁에 만난 친구들도 늘 그랬듯이 과거의 무용담과 군대 이야기로 만남을 채워갔다. 필자가 만난 사람들은 누구도 필자가 정작 듣고 싶었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미국에서 출발할 때부터 궁금했다. 지금 한국의 사회 분위기는 어떨까? 한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은 최근의 사태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한국이 아닌 땅에 살면서도 숙명적으로 한국을 생각할 수밖에 없기에 늘 각종 매체에 실려오는 한국 소식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한국 사람들의 진짜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어쩌다 한국에 나올 때마다 한국 사람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식당에서도, 택시 안에서도, 어디에서도 사람들은 자신들이 겪고 있는 사회 현안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정치든, 경제든, 어떤 것이든 사람들은 거침없이 자신들의 의견을 밝혔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그들의 입에서 최순실과 박근혜라는 이름을 들을 수 없었다. 정말 의외였다. 미국에서 접한 한국의 언론들은 낮이고 밤이고 그들과 관련된 것들을 들추어내고 있었다. 심지어는 신고 있는 신발과 입고 있는 옷의 값이 얼마인지까지 찾아냈다. 그러나 한국에 있는 사람들은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 하지 않았다.

 

부끄러움. 부끄러움 때문이라 생각됐다.‘내 손으로 뽑은 대통령이 그렇게 무능한 사람이었다니, 그가 운영하는 나라의 국민으로 살아가고 있다니’하는 자신을 향한 부끄러움 때문에 사람들은 입을 닫고 있는 것이라고. 그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곪은 환부에 소금을 붇는 격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짐작했다.

 

미국에서 언론들의 보도만 보고 분노하고 어처구니 없어 하던 필자는 차라리 행복한 사람이었다. 이젠 분노할 수 조차 없는 한국 사람들의 모습이 안타까웠다.

  

이번 사태를 놓고 한국의 정치권은 저마다 저울질에 나섰다. 대통령 탄핵과 하야를 거론하기도 하고, 거국 중립내각을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시민들의 침묵속에서도 각계각층에서는 연일 이번 사태와 관련한 시국성명을 발표하며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언론은 여론을 부추기고 여론은 언론에게 힘을 실어주며 말의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거세지고 있다. 지금 한국 사회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안고 있는 것처럼 불안의 연속이다.

  

누군가 이 사태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면 그 책임은 한국 사람 모두의 것이다.‘대통령이 되어서는 안될 사람’이 그 자리에 올랐다고 당장 내려오라고 아우성을 치는 것은 무책임하고 소아적인 억지이다. 대통령은 적법한 선거절차를 거쳐 국민이 뽑았다. 투표는 국민의 권리이기도 하지만 책임이기도 하다. 현 사태에 대한 책임을 서로에게 따지며 달려드는 것은 성숙한 국민의 자세로 비쳐지지 않는다.

  

대통령을 비롯해 누구를 막론하고 엄중한 조사를 통해 잘못이 드러나면 값을 치러야 할 것이다. 그 과정은 투명하고 객관적이며 이성적이어야 한다. 온 나라가 감정의 폭발 속에 진흙탕 싸움처럼 흘러간다면 아무런 결과도 기대할 수 없다. 마치 현 사태 외엔 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총력을 기울여 정치적 스캔들 하나에 목을 걸고 있으면 나라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아무리 기가 막힌 일이 벌어졌어도 국정은 제대로 운영되어야 하고 국민들의 삶은 진행되어야 한다. 부끄럽다면 부끄러운 줄 알고 조용히 한 마음으로 일을 처리해야 한다.

  

지금 한국의 정치 상황에서 해결책을 찾는 것은 격앙된 감정을 가라앉히고 냉정하게 국가의 실익을 따질 때만이 가능하게 보인다. 분열되어 서로에게 칼을 겨누고 있는 현실에서는 패자만 있을 뿐이다. 승자는 한국을 둘러싼 주변국 들이다.

  

아무리 기가 막히고 어처구니 없어도 한국인은 모두 한 배를 탔다. 배가 산으로 가는지 절벽으로 떨어지는지 봐 가면서 목소리를 높일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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