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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으로 가버린 이야기
01/23/23  

이제 인생에 반쯤은 살았으려나…... 마흔이 넘는 나이가 되고 나니 남들이 하는 소리에 조금씩 둔감해진다. 마음에도 굳은살이 생기고 면역이 생겨서 그런 걸까…... 누가 뭐라 한들 전처럼 호들갑스럽게 반응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다소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는 상대가 남아있는데 그것은 바로 가족이다.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 나를 가장 잘 아는 가족이 나를 향해 던지는 지적이나 질책 앞에서는 마치 발가벗겨지는 것처럼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게 된다. 그 옛날 나에게 "너는 사이즈 스몰"이라며 몸매 콤플렉스를 극복하게 해 주었던 남편이 결혼해서 사는 동안 새로운 콤플렉스를 안겨주는 경우랄까?  

얼마 전 재미로 본 성격 테스트에서 나는 비난을 못 견디는 유형이란다. 비난을 달가워하는 사람이 그 어디에 있을까? 당연한 말이겠지만 나 같은 유형은 비난이 그저 싫은 것뿐 아니라 아마도 예민하게 받아들일 가능성이 크다. 

예컨대 나름 생각해서 저녁 식사를 차렸는데 아이가 "나 이거 먹기 싫은데…..." 하며 깨작거리면 단전에서부터 울화가 치밀기 시작한다. 이 정도에서 끝나면 다행이지. 남편도 저녁을 먹지 않고 온다고 하여 일부러 음식을 따로 챙겨뒀는데 나와 상의도 없이 퇴근길에 본인 먹을 음식을 잔뜩 따로 사 갖고 들어오는데 또 한 번 단전에서 무엇인가가 올라오기 시작한다. 나름 이성적인 지성인이라면 응당 '아…... 이 사람은 오늘 이게 먹고 싶었나 보구나. 그럴 수도 있지.' 해버리면 그만인데 가끔씩 이성을 엿 바꿔 먹고 아주 치졸하게 감정적일 때가 있다. 그럴 때면 '평소 내 요리를 안 좋아하는구나. 나도 오늘은 나름 생각해서 준비한 건데 결국 음식은 남고 돈은 돈대로 쓰고…...' 이런 식으로 아니꼬운 마음이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된다. 

며칠 전에는 남편이 고양이 화장실을 보며 "와…... 얘네들 진짜 똥 많이 싸네…..." 하며 지나가는데 그 소리가 내게는 "고양이 화장실 청소 좀 해야겠는데?"로 들려서 빨래를 개다 말고 혼자 움찔했다. 그리고 '정 지저분하면 직접 좀 치우면 되지…...'라고 마음속으로 구시렁대며 결국 몸을 일으켜 고양이 배설물을 치우기 시작했다. 깔끔하고 알뜰한 솜씨 좋은 살림꾼도 아니면서 하루 종일 온 식구들 뒤치다꺼리가 일상인 주부이다 보니 알게 모르게 꽤 많은 스트레스에 휩싸여 있지 않은가 싶다. 

그러다 보니 상대가 대놓고 비난을 쏘아 올린 것이 아닌데 나 스스로 그것을 비난으로 받아 가슴을 후비는 경우도 종종 생기는 것 같다. 말을 하지 않아도 상대의 찌푸려진 미간, 한숨, 못마땅한 입꼬리, 실망한 낯빛 등이 모두 날 선 비난처럼 느껴지면 이유 없이 힘이 빠지고 무기력해진다. 내가 발을 동동거리며 애써봤자 알아주기는커녕 자잘한 구멍들만 책잡히는 것 같아 한숨이 절로 나고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말아 버릴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예전에 막내가 무료 심리검사를 받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아이가 상담사에게 말하길 자기는 식구들이 자기를 혼내면 화가 나는데 엄마가 자기를 혼낼 때는 슬프다고 했단다. 그 이야기를 듣는데 가슴이 울컥했다. 아이의 마음이…... 그 슬픔이 무엇인지 바로 알 것만 같아서…... 

그런데 말이다. 우리는 특별한 관계 안에서 그런 슬픔을 숱하게 겪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때로는 상처를 받고 또 때로는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그 기반에는 분명 사랑이 내재되어 있기에 다시 마음을 추스르고 또 힘을 내게 된다. 그런 사랑조차 없다면 굳이 상처를 받거나 슬픔을 느낄 이유도 없겠지. 건강하고 화목한 가족 관계나 친구 관계를 지키는 일이 때로는 어렵게 느껴지지만 어찌 보면 생각보다 간단하다. 바로 이것만 해줘도 관계에서 생기는 문제의 절반은 사라질 것이라고 자신한다. 상대가 슬퍼하면 안아주고 그게 나 때문이면 사과하고, 상대가 내게 손을 내밀면 용서하는 것! 

오늘 빨래만 네 판을 돌렸더니 아직도 귓가에서 건조기 돌아가는 소리가 나는 것만 같고, 설연휴 시작이라고 이것저것 10kg 넘는 식재료를 들고 다녔더니 팔죽지가 아프고, 내일 먹을 거라며 야심 차게 만든 엘에이갈비는 생각보다 맛이 덜하고 (부디 내일은 더 맛있어지길), 불금에 연휴 시작인데 평소보다도 늦게 귀가한 남편은 벌써 코를 골며 자고 있지만 괜찮다. 나는 괜찮다. 나는 슬프지 않다. 용서한다. 그리고 그 아픔까지 사랑한 거다. 켁?! 

근데 왜 갑자기 이런 글을 쓰게 되었지? 완전히 산으로 가버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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