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고원(高遠)
04/23/18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과 이런 저런 인연을 맺으며 살아간다. 필자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필자에게는 특별한 인연이 하나 있다. 그 인연의 출발은 지금으로부터 십 수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필자는 LA에 있는 한 문학 창작 교실에서 문학에 열정을 가지고 있는 약 10여 명의 늦깎이 학생들과 함께 글쓰기에 대해 공부했다. 수업은 각자 써온 글을 낭독하고 그것을 들은 다른 학생들이 각자의 의견을 발표하면 마지막으로 선생님께서 종합해서 당신의 의견을 제시해 주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선생님은 80이 넘은 고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학생지도에 한 치의 소홀함도 없었다. 지금도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직유보다는 은유가, 표층적 의미(겉에 들어난 의미)보다는 심층적 의미(숨은 뜻)가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시던 모습과 목소리가 생생하다.

  

문학 창작 교실 마지막 수업에서 선생님은 당신의 꿈에 대해 말했다. 인문학을 강의하는 작은 대학을 설립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대학 설립 추진을 위해 몇몇 사람들을 실무위원으로 임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선생님은 당신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다음해 1월에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미주 문단에 당신이 남긴 유산은 도처에서 찾을 수 있다. 별세한 지 1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도 제자들은 여전히 교실에 모여 문학 공부를 하고 있다. 그리고 선생님에게 글을 배웠던 제자들이 LA 인근 곳곳에 또 다른 글공부 교실을 열고 선생님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1988년 당신이 창간했으나 타계와 함께 발간이 중단됐던 문예지‘문학세계’는 선생님의 고결한 성품과 문학적, 학문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창립된‘고원기념사업회’에 의해 2012년에 복간되어 매년 발간되고 있다. 또 그해부터 당신의 이름을 딴‘고원문학상’을 제정해 해마다 문학적으로 뛰어난 성과를 나타낸 문인들을 대상으로 시상하고 있다. 현재까지 마종기 시인을 비롯해 모두 7명의 문인이 수상했으며 시인 김남조, 문학평론가 임헌영 등 각 분야 한국 최고의 문인 및 평론가들이 심사위원으로 참여해 그 상의 가치를 증명했다.

  

살아생전 당신이 한국 현대문학의 역사에 남긴 업적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더구나 대부분이 이곳 미국에서 쌓은 성과라 더욱 경이롭다. 수상 경력만 보아도 당신의 공적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신은 조국을 빛낸 해외동포상(1995), 국어운동공로상(한글학회, 1997), 시조문학상대상(시조월드, 2003), 해외한국문학상(한국문인협회, 2007) 등 누구나 부러워하는 상들을, 그것도 해외에서 쌓은 한국어와 한국문학 발전의 공로로 받았다.

  

하지만 당신의 공적은 한국 내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당연히 한국의 주류 문단에서 떨어져 이곳 미국에서 활동해 온 까닭이다. 당신은 1964년 미국 이주 후에도 많은 시집을 한국에서 발간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문인들에 비해 한국의 독자들에게는 낯선 것이 사실이다.

  

이런 현실에서 선생님의 고향에 당신의 뜻과 문학적 업적을 기리기 위한 시비 건립의 가능성을 알아보기 위해 지난 11월초에 선생님의 고향인 충청북도 영동군 학산면 박계리를 찾았다. 박계리 이장을 만났고 학산면을 방문했으며 영동군청의 관계자들을 만났다. 그들로부터 많은 조언을 듣고 일의 진행 방향을 설정하고 계획을 세워 하나씩 차근차근 추진해 가고 있다.

 

그런데 영동군청에 시비 건립에 대한 협조 공문을 작성하면서 선생님에 관한 놀랄 만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선생님이 1960년대에 쓴 시들이 아직도 한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널리 읽히고 있었다. 인터넷에서 선생님의 대표적인 시 가운데 하나인‘오늘은 멀고’를 검색해 보니 문학 애호가들이 개인 블로그나 카페 등에 올린‘오늘은 멀고’가 화면 가득 채우는 것이 아닌가.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했으면서도 그분의 시인으로서의 면모를 닮고 배우려고만 했지 그분의 시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지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10주기가 다 되어가는 지금에 와서야 스승의 시를 찾아 감상하고 있으니 부끄럽고 송구스러운 마음이다.

  

선생님은 언제나 꿈을 꾸며 살았다.‘오늘은 멀고’라는 시에서도 꿈을 노래했다. 선생님은 80이 넘어 만난 늦깎이 학생들에게도 꿈에 대해 말씀했다. 그리고 당신이 꾸는 꿈은 결코 허황되지 않았다. 오늘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내게 주어진 의무와 책무, 그리고 내일로 향하는 의지!

  

꿈은 꾸는 자의 것이다. 허황된 것은 꿈이 될 수 없다. 오늘이 있기에 내일이 있는 것이다. 10주기에는 선생님의 고향 땅에서 당신께서 이룩한 오늘과 내일의 모습을 담은 시비를 볼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오늘은 멀고’전문은 37쪽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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