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취향은
03/06/23  

누군가 그랬다. 취향이 확실한 사람이 더 대접받게 되어있다고. 취향을 물을 때 "아무거나 상관없어."라고 대답하는 사람보다는 "이것!"하고 명확히 말하는 사람의 의견에 귀 기울일 수밖에 없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취향이 확고한 편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짜장 vs 짬뽕, 블랙 vs 화이트, 산 vs 바다, 한식 vs 양식, 신라면 vs 진라면, 밥 vs 국수, 댄스음악 vs 발라드 등 둘 중 하나만 고르라고 하면 그게 내겐 그리 간단하지 않다. 대부분의 경우 그때그때 나의 선택이 달라지기도 하고 혹 내 선택대로 되지 않았다고 해도 크게 개의치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신라면을 더 선호하지만 없으면 진라면도 맛있다. 러닝, 청소할 때는 댄스음악을 듣고 싶고 컴퓨터 앞에서 업무 할 때는 발라드곡을 듣는 것이 좋다. 

하지만 개인의 기호와 취향이 꽤나 한결같이 적용되는 분야가 있는 것 같긴 하다. 친구 중에 금사빠(금방 사랑에 빠지는 사람)가 있었는데 하루는 그 친구가 좋아했던 남자들을 쭉 읊어보다가 그들이 하나같이 매우 비슷하게 생겼다는 사실을 깨닫고 둘이 깜짝 놀랐던 적이 있었다. 그 남자들의 외모를 종합해 보니 마른 체격에 키가 크고 흰 피부에 눈이 크다는 공통점이 있었던 것이다. 

나에게도 별로 바뀌지 않는 취향이라는 게 있다면 그중 하나는 영화를 고르는 취향일지도 모르겠다. 실은 며칠 전에 이런 경험을 했다. 공휴일인데 모처럼 혼자 시간이 생겨서 넷플릭스에 영화 목록을 뒤적였다. 평소 보고 싶은 영화를 찜해두었기 때문에 오래 헤매지 않고 그 중에서 구미가 당기는 영화를 고를 수 있었다. 그날 나의 선택은 바로 브래드 피트 주연에 2014년 개봉작 퓨리(Fury)였다. 원래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좋아하는 편인데 브래드 피트가 주연이니 아주 형편없지는 않을 거라는 기대도 있었다. 

영화가 시작되고 한 30분쯤 지났나…... 아뿔싸 아무래도 본 영화 같았다. 요즘에는 영화를 요약해서 소개하는 채널들도 많으니 그런 식으로 접했을 수도 있어서 일단 계속 이어서 봤다. 그런데 한 시간쯤 되었을 때는 '아…... 이거 분명히 본 영화다.' 하는 확신이 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결말이 도저히 기억나지 않는다는 점. 브래드 피트가 전차부대 대장 역을 맡았는데 탱크 한 대와 4명의 대원들만으로 수백 명의 적들과 맞서 싸우는 후반부에서는 현실성이 떨어져서 집중하는 게 꽤나 힘겨웠다. 그렇지만 브래드 피트가 마지막에 죽는지 안 죽는지를 확인해야만 해서 결국 끝까지 볼 수밖에 없었다. 본 영화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다시 보기 시작한 것도 실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긴 하다.  넷플릭스가 보유한 영상이 4천 개가 넘는데 하필 고른 영화가 이미 본 영화라니......

그러고 보니 옷도 좀 그런 것 같다. 옷장을 열어보면 비슷한 류의 옷들이 즐비한데 다시 사들이는 옷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원래 그런 스타일의 옷을 좋아하는 것인지 그런 스타일이 나에게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뭐가 먼저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비슷한 옷들이 여러 벌 있다는 사실만은 확실하다. 가끔 큰마음을 먹고 구매한 뭔가 개성 넘치는 옷들은 한두 번 입고는 다시 손이 가질 않는다. 그래서 옷장이 미어터지는데도 맨날 입던 옷만 줄기차게 꺼내 입게 되는 모양이다. 

유일하게 한 우물만 파지 않는 분야가 있다면 그건 아마도 음식? 워낙 다양한 음식을 좋아하고 새로운 음식도 잘 받아들이는 편이기도 하지만 의도적으로 같은 음식을 연이어 먹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너무 좋아해서 대용량으로 사들이거나 몇 끼를 연이어 신나게 먹다가 두 번 다시 그 음식을 먹을 수 없게 된 적이 서너 번쯤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좋아하는 음식과 영영 이별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계속해서 그 음식만 먹는 일은 피하려고 한다.   

물론 영원히 변치 않을 것만 같던 취향도 세월이나 환경의 영향을 받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어릴 때 좋아했던 애니메이션 영화를 보면 이제는 하품이 자꾸 나오는 것도 그렇고 젊은이들의 사랑 이야기는 때론 너무 시시해 보여서 자꾸 코웃음을 치게 되기도 한다. 편지지, 카드, 스티커, 메모지를 사 모으는 취미가 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것들을 사서 뭐 하나 싶고 뛰는 게 세상에서 제일 끔찍했는데 요즘에는 일부러 시간과 돈을 들여가며 뛰러 다닌다. 

이렇게 쓰다 보니 앞으로 남은 인생, 내 취향이 어디로 어떻게 흘러갈지 굉장히 궁금해진다. 설마 영화 Fury를 다시 보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겠지?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