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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테너 고 박인수 교수
03/13/23  

국민 테너, 성악가 박인수 전 서울대 교수가 2월 28일 LA에서 별세했다. 한 달여 전에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에 이어 맹장이 터졌으나 환자의 여러 가지 건강상의 이유로 수술하지 못하고 그대로 둘 수밖에 없었다는 소식을 들었던 터였기에 올 게 왔다고 생각했다.

박 교수 생전에 몇 차례 함께 자리 했었다. 대부분 여러 사람들과 함께하다 보니 박인수 교수의 호탕한 웃음소리만 생생할 뿐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는 기억나는 것은 많지 않다.

그래도 언젠가 박 교수의 제자 두 사람과 박 교수 동기 한 분과 함께했던 날의 기억은 생생하다. 그날 박 교수와 그의 고교 동기이자 단짝 친구는 두 사람의 고교 시절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며 신이나 있었다.

그날 들은 얘기 가운데 하나를 요약하면 친구가 여학생을 만난다 하여 박인수 교수가 따라 나섰다. 당시 전차를 타고 다니던 시절인데 원효로 어느 빵집에서 만나 얘기를 한참 하다가 친구와 여학생을 남겨 두고 집에 가려고 나섰는데 전차표가 없었다. 그래서 원효로에서 미아리까지 걸어갔다는 아주 간단한 얘긴데 어찌나 얘기를 맛깔나게 하는지 듣는 사람들은 배꼽을 잡고 웃었다. 친구에게 전차표 한 장 달라고 하기 싫어서 그냥 걸어왔을 박인수 교수의 그날 그 심정을 나도 비슷한 경험을 한 기억이 있기에 더 재미있게 들었다. 참고로 서울의 전차는 1899년부터 1968년까지 운행됐다. 돈암동 미아리 고개 올라가기 전 성신여중고, 성신여대 앞 언덕배기 밑이 전차 종점이었다.

박인수 교수는 5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공무원이었으나 가정 형편이 어려워 신문 배달을 하면서 고학했다. 서울 음대 4학년 때인 1962년 슈만의 가곡 ‘시인의 사랑’ 전곡을 부르며 성악가로 데뷔했다.

사람들은 어느 특정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사람들에 관해 언급할 때 그 사람의 성공한 면만을 부각시킨다. 그러나 성공한 사람들 모두가 처음부터 끝까지 탄탄대로 꽃길만 걸었던 것은 아니다. 박인수 교수에게도 엄청난 시련과 좌절의 시간이 있었다.

첫 번째 시련은 1967년에 찾아왔다. 그해 '마탄의 사수' 주인공 ‘막스’ 역을 맡았다. 그 공연에서 잘하고 싶은 욕심에 발성을 바꾼 게 화근이 되어서 오페라 전체를 완전히 망치고 말았다. 그러자 모든 언론이 일제히 혹평을 쏟아냈고, 결국 첫 오페라 무대에서 내려오자마자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그 후 남대문 시장에서 포장마차를 했으나, 이것마저 실패했다. 1968년 친구의 도움을 받아 서울 시향과 협연으로 부인과 함께 부부 음악회를 열었고, 다행히 좋은 평을 얻었다. 이후 여기저기서 출연 제의가 쇄도했고, 프리마 오페라단에서 올린 '사랑의 묘약'에서 ‘네모리노’ 역을 맡아 드디어 재기에 성공했다.

두 번째 시련은 1970년 5월 미국 진출 후 닥친 생활고였다. 그는 줄리아드 음대에서 마리아 칼라스의 마스터 클래스 오디션에 합격하여, 전액 장학금을 받고 줄리어드 음대에서 성악 교육을 받았다. 생활비를 매달 받긴 했지만, 뉴욕의 집세를 감당하기엔 빠듯하여, 뉴욕의 한국 음식점에서 배달 일을 하며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힘든 시기를 잘 버텨 1976년부터 미국 뉴 헤븐 오페라단(New Heaven Opera)과 버팔로 오페라단(Buffalo Opera)에서 '라 보엠'의 ‘로돌프’ 역을 맡아 열연했고, 캐나다의 연극축제인 온타리오 더 쇼 페스티벌(Ontario the Show Festival)에서 '낙소스의 아리아드네'의 ‘바쿠스’ 역을 멋지게 소화해 내며 호평을 받았다. 이 시기, 그는 1년에 반 이상은 미국 전역과 남미, 캐나다 등으로 연주 여행을 다녔다.

그 후 1983년에 귀국하여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 교수로 임용되었다. 그리고 2003년 퇴임할 때까지 3백회가 넘는 오페라 공연을 했다.

세 번째 시련은 1989년에 찾아왔다. 그해 클래식과 가곡을 접목한 국민가요 '향수'를 가수 이동원과 함께 불러서 전국적으로 주목을 받았으나, 공연 직후 클래식계에서 '클래식 음악을 모욕했다'는 비난을 받았고, 자신이 단장으로 내정되었던 국립 오페라단에서 제명당했다. 당시, 클래식과 대중가요의 크로스오버는 상당히 생소했고, 이 때문에 클래식계에서 비난과 반발이 심했다. 그러나 1993년 시작된 KBS의 <열린 음악회>에서 크로스오버 무대가 큰 호응을 얻으며 박 교수는 대중의 인기를 얻었다. 루치아노 파바로티(이탈리아),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이상 스페인)등 일명 세계 3대 테너가 주도했던 성악계의 크로스오버 추세가 박 교수의 선견지명으로 한국에서도 정착하게 된 것이다.

박 교수는 2003년 서울대 정년퇴임 후 백석대학교 석좌교수, 음악대학원장을 맡아 학생들을 가르쳤다. 정년퇴임 후에도 사망 전까지 매년 50회에 가까운 공연을 소화했다.

시련을 이겨내고 불세출의 테너로 거듭나 한국의 성악사에 큰 족적을 남긴 고 박인수 교수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하며 유가족들에게 삼가 조의를 표한다.

안창해. 타운뉴스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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