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만들기
04/23/18  
밤새 비가 내렸다. 지금도 제법 굵은 빗줄기가 이어지고 있다. 어제 뉴스에 의하면 올겨울 남가주에는 예년 평균 강우량의 두 배 정도의 비가 내렸다고 한다. 그래도 가뭄이 해소되려면 비가 좀 더 와야 된다고 하니 그 동안 가뭄이 얼마나 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계속되는 비와 바람으로 몇 개 도시들은 전기가 끊겨 주민들이 고생하고 있으며, 소매상과 식당들은 줄어든 매출 때문에 울상이라고 한다. 비가 안 와도 걱정, 너무 많이 와도 걱정이니 세상에 걱정 그칠 날이 없다.
 
 
한국의 장마철처럼 연일 비가 오다가 잠시 그쳤던 며칠 전, 한국에서 온 큰외삼촌이 양노병원에 계신 아버지를 방문했다. 셋째 외삼촌과 외당숙도 함께 왔다. 
주무시던 아버지가 인기척을 느끼고 깨어났다. 큰외삼촌이 가까이 다가가 인사하였으나 아버지는 누군지 못 알아보는 눈치였다. 이름을 말하니 그제야 기억하는 듯했다. 그래도 누군지 확실히 아는지 확인하기 위해 누구냐고 물으니 큰처남이라고 대답했다. 하긴 큰외삼촌이 50대 말일 때 보고 20년도 더 지난 79세에 만났으니 한눈에 알아보지 못 한 것일지도 모른다.
 
 
큰외삼촌은 작년에 아버지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며 거기에 잘못된 부분이 있다고 했다. 아버지가 해군으로 입대해서 해병대를 창설하면서 해병대 1기생을 가르치고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했는데 그 신문에서는 아버지를 1기생으로 표기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물었다. 1기생이 맞냐고? 아버지는 그렇다고 했다.
해병대에 다녀온 셋째 외삼촌이 말했다. 해군에서 와서 1기생을 가르쳤지만 해병대로는 1기니까 1기가 맞을 거라고 했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의료 종사원이 아버지 점심식사를 갖고 왔다. 세 가지 죽과 우유 한 컵, 오렌지주스 한 컵이 전부였다. 아버지는 침대 시트를 올려서 자세를 바르게 하고 흰죽을 먹기 시작했다. 다른 것은 손도 대지 않았다. 다른 것도 좀 드시라고 했으나 아버지는 생각이 없다고 했다.
 
 
식사를 마치고 아버지는 TV를 보며 자막을 열심히 읽었다. 아버지는 평소에도 누가 있든지 신경 쓰지 않고 마치 글자를 처음 배우는 아이들이 글자가 보일 때마다 따라 읽는 것처럼 자막을 따라 읽었다. 셋째 외삼촌은 그렇게 글자를 따라 읽는 것이 치매 예방도 되고 글자를 잊지도 않아 아주 좋다고 말했다.
 
 
함께 나가서 식사하자고 했으나 아버지는 이미 했다며 거절했다. 아버지에게 작별을 고하고 일어섰다. 큰외삼촌은 다리를 약간 절고 있었다. 작년 4월에 넘어져서 오른쪽 무릎을 약간 다친 후로 그렇게 되었다며 병원에서 뚜렷한 병명을 찾지 못해 당신이 자신의 병을 노병(老病)이라고 이름지었다고 했다.
 
 
중학생 시절 큰외삼촌이 일하던 은행을 가끔 찾았다. 그냥 씨익 웃으며“지나가다 들렸어요.”하면 외삼촌은 빳빳한 돈을 몇 장인가 손에 쥐어 주었다. 큰외삼촌은 평생을 은행에서 일하다 은퇴했다.
 
 
병원 근처의 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하고 헤어졌다. 헤어지기 전 큰외삼촌에게 금일봉을 드리니 괜찮다며 손사래를 쳤다“. 큰외삼촌이 제게 용돈 주느라고 고생했지요. 이젠 제가 드려야죠.”하며 손에 쥐어 드리니 마지못해 받았다.
 
 
큰외삼촌은 멕시코로 크루즈 여행을 다녀온 후 며칠 더 쉬다가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이라고 했다.
 
 
나이 들수록 과거에 더 마음 쓰는 것은 앞으로 만들어 갈 추억이 많지 않음을 알기 때문일지 모른다. 혹은 자신과 같은 기억을 가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일 수도, 나이들어 초라해진 자신에 대한 보상 심리 때문일 수도 있다. 큰외삼촌의 방문으로 현재로 돌아와 동질감을 깨닫게 한 과거는 그래서 유쾌하면서도 그만큼 가슴 저리게 하는 것이다.
 
 
아버지와 큰외삼촌과의 연대의 끈은 가족이란 이름으로 시작됐지만, 20년도 더 떨어져 지낸 지금에 와서는 기억의 공유가 이어가고 있으니, 누구를 만나더라도 즐겁고 유쾌한 기억 만들기에 노력해야겠다. 내가 먼저 양보하고, 내가 먼저 베풀고, 내가 먼저 다가가 웃는 얼굴로 인사해야겠다. 긴 비 멈춘 사이에 잠깐 비추는 햇살처럼 밝고 따뜻한, 그래서 더욱 귀한 사람
으로 기억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날 잠시 그쳤던 비가 지금 또 계속 내리고 있다. 오늘도 하루 종일 내린다고 하니 비 피해가 확산될까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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