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전을 보고 나서
03/13/23  

나는 사커맘 ('축구하는 자녀의 엄마'라는 뜻으로 미국에서 자녀들에게 스포츠를 시키고 열성적으로 지지해 주는 특정 계층)이 되고 싶었다. 운동은 젬뱅이지만 스포츠를 관전하는 것만큼은 좋아해서 보고 있으면 꽤나 진지하게 몰입하는 편이라 사커맘의 자질을 충분히 갖추었다고 자신했다. 하물며 형제나 친구들의 친선 경기를 구경하면서도 초흥분하기 일쑤였는데 내 자식이 출전하는 경기라면 내가 어찌 반응할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아이를 넷이나 낳았고 그 중에 세 명은 아들이니 적어도 한 명쯤은 운동에 소질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내 자식들은 하나같이 나를 닮았는지 운동에 소질이 없는 듯했다. 아니 눈에 띄게 잘하는 사람이 없었다쯤으로 해두자. 첫째는 일찌감치 운동에 관심이 없었다. 첫아들을 낳고 사커맘의 꿈이 가득하던 시절, 축구며 농구며 시켜봤는데 잘 못하니 재미가 없어서 그런지 스포츠 자체를 좋아하지 않았다. 공놀이를 하는 것보다는 흙을 파며 개미들을 관찰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둘째는 딸, 운동하는 딸도 좋다! 사커맘은 딸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런데 우리 딸은 완전 내과였다. 공이 오면 멀뚱멀뚱. 잡을 생각도 그렇다고 제대로 피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 

셋째는 운동은 일단 마다하지 않고 닥치는 대로 하는 스타일. 축구, 태권도, 인라인 스케이트, 수영, 탁구 등 모두 시도했지만 또래보다 유난히 작은 체구 탓인지 두각을 나타내진 못했다. 그래도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뭐든 하겠다고 하니 돈 들어가는 것만 빼면 이것도 그리 나쁘진 않다. 그리고 초등학교 3학년인 막내는 아직 탐색이 더 필요해 보인다. 운동신경 자체가 뛰어나진 않은 것 같지만 얼마 전 태권도 품새 대회에서 1등을 하기도 했고 뭐든 배우면 그대로 잘 따라 하는 편이라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다. 

하지만 내 생에 자녀들의 운동 경기를 볼 기회가 오기는 할까... 사커맘의 꿈을 조용히 접으며 대신 중요한 국가 전은 빠짐없이 보려고 한다. 특히 "일본에게는 가위바위보도 지면 안된다."며 온 국민이 파이팅 넘치는 한일전은 항상 손에 땀을 쥐며 몰입하게 된다. 한일전은 국가대표 선수들은 물론이고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활활 불타오르는 승부욕으로 대동단결하여 단순한 스포츠 응원을 뛰어넘어 일종의 애국심 같은 것에 휩싸이는 것 같다. 특히 인기 종목인 야구와 축구 경기는 경기 전후로 발생하는 파장이 굉장히 강력해서 평소 스포츠를 즐기지 않는 사람들도 만나면 모두 한일전 이야기를 할 정도다. 솔직히 두 종목 모두 객관적인 전력이나 공식적인 기록은 대한민국이 일본에 열세지만 신기하게도 한일전에서만큼은 항상 예상치 못한 경기력과 결과를 가져오곤 했다.  

하지만 오늘 있었던 2023 WBC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한일전에서는 애석하게도 우리가 일본을 꺾고 승리하는 가슴 벅찬 장면을 볼 수는 없었다. 먼저 선취점을 가져가며 멋지게 시작했지만 3회에 4점을 실점하며 역전된 이후로 다시 점수를 되돌리지는 못했다. 4-13 참패이니 정말 가까스로 콜드게임을 면한 셈이었고 경기 내내 일본의 전력이 확실히 우리보다 한 수 아니 몇 수 위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수비 실책은 말할 것도 없고 투수들의 흔들린 멘탈이 그대로 제구에서 드러났다. 경기 후반부에 젊은 투수들이 한일전의 중압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연이은 볼넷으로 일본 타자들을 줄줄이 출루시키는 것을 보고 있자니 경기의 승패가 문제가 아니라 투수들이 겪을 극도의 스트레스가 고스란히 느껴져 내 마음도 괴로웠다. 

예전 도쿄 올림픽 배구 경기에서 한국과 일본이 맞붙어 승리했을 때 김연경 선수가 인터뷰에서 "일본전은 감정에 휩쓸리는 경기가 많다. 짜증 나는 느낌도 많이 난다"며 "감정 조절을 안 하면 일본전은 어렵기 때문에 웃는 것보다 마인드컨트롤을 하면서 한 점 한 점 최선을 다하려고 했다"라고 말했는데 한일전을 임하는 국가대표 선수들의 심리적 압박과 스트레스를 감히 상상하기도 어렵다. 

자고 일어나면 한일전 참패에 대한 기사가 엄청나게 쏟아져 올라올 텐데 내 마음도 좋지 못하다. 여느 때 같았으면 나도 같이 손가락질하며 욕했을 텐데 이번에는 20대 젊은 국가대표 선수들을 지켜보는 내 마음이 마치 사커맘 심정과 비슷했던 것 같다. 경기 내내 전전긍긍하면서 우리가 잘할 때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고 우리가 못할 때는 화가 나는 대신 안타깝고 속상했다. 8강 진출은 어렵게 되었고 분명히 되짚어 봐야 하는 실책들이 많았지만 오늘밤이 우리 선수들에게 너무 길고 외로운 밤이 아니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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