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의 추억
04/23/18  

어려서는 설을 한 해에 두 번씩 쇘다. 신정은 외가에서 지내고 구정에는 장손 댁인 큰 집에서 차례를 지냈다. 모두 선산으로 가 드문드문 떨어져 있는 조상님들 묘소를 일일이 찾아다니며 인사드리는 것도 이 때 치루는 연중 행사였다.

 

 

온 집안 식구를 다 만나는 구정도 좋았지만, 신정에 외가 가는 것을 더 좋아 했다. 외가는 외삼촌이 다섯, 이모가 셋이나 되는 대가족이어서 우리 식구까지 가면 온 집안이 떠들썩했다. 외할머니는 평소에도 영양가를 고려해 짜임새 있는 식단을 상에 올리는 분이었다. 늘 먹는 김치찌개, 콩나물 국 하나도 남다른 맛을 냈다. 특히 설음식은 그 정성에서부터 맛에 이르기까지 누구도 흉내 내지 못했다. 갈비찜, 산적(散炙), 식혜,수정과 등이 기억난다.

 

 

외할머니가 해 주던 설음식을 얘기하면서 떡국을 빼놓을 수 없다. 누런 놋그릇에 담긴 외할머니 떡국은 맛은 물론 보기도 좋았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하얀떡 위에 달걀흰자위와 노른자위를 제 각각 얇게 부쳐썬 지단, 버섯, 실고추, 곱게 자른 검은 김 등의 고명이 얌전히 얹혀 있다. 먼저 지단을 젓가락으로 한 번 집어먹은 다음 뜨거운 국물에 숟가락을 깊숙이 담그고 아래위로 몇 차례 저은 후 먹기 시작한다.

 

 

뭐니 뭐니 해도 외할머니 설음식의 백미는 찹쌀떡이었다. 외할머니가 만든 커다란 찹쌀떡은 크기에 비해 살이 얇고 속에 팥이 아주 많았으며 심하게 달지도 않았다. 두어 개만 먹어도 배가 부르고 모든 근심걱정이 사라지는 그런 특별한 것이었다. 외할머니 집 전체에 배어 있었던 오래 된 장롱냄새가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처럼, 외할머니 찹쌀떡만 먹으면 몸 구석구석에 스며있는 불안이 사라지고 평안함이 찾아 왔다. 참나무통에서 오래 묵은 짙은 색깔의 포도주 냄새 같기도 하고, 수십 년 집을 떠받치고 있는 목재들의 너그러운 냄새 같았던 장롱 냄새. 그와 함께 커다랗고 말랑말랑한 외할머니 찹쌀떡의 감촉. 한 입 베어 물면 부드럽고 달콤한 팥이 입안에 가득 차며 마음 속 깊이 안도와 평안이 스며들었다.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었던 손맛이었고, 모든 것을 덮어 주고 이해해 주던 사랑의 맛이었다.

 

 

집에 돌아 갈 때면 외할머니가 찹쌀떡을 잔뜩 싸 주셨다. 정월 내내 구워도 먹고 쪄도 먹었다. 어머니는 아들이 그렇게 맛있게 먹는 찹쌀떡을 만들어 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아마 외할머니의 그 맛을 흉내낼 자신이 없어서였을 것이다. 떡국 맛은 누구라도 비슷하게 흉내를 내지만 외할머니 찹쌀떡 맛을 내는 사람은 아직까지 한 번도 만나지 못 했다.

 

 

중학교 입학하면서부터는 외가에 잘 드나들지 않게 되었다. 그래도 몇 해 걸러 한 번씩 외할머니 표 찹쌀떡을 맛보곤 했으나 미국 살면서는 아예 잊고 살았다. 외할머니는 15년을 병상에 계시다가 작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이제 외할머니 찹쌀떡은 영원히 맛 볼 수 없게 되었다.

 

 

설날에 영영 맛 볼 수 없게 된 것이 외할머니 찹쌀떡만은 아닐 것이다. 미국에서도 떡국은 일 년 내내 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지만, 설이면 느끼던 풍성하고 정겨운 맛은 찾을 수가 없다. 먹는 것뿐만 아니다. 설날에 친척들과 함께 하던 윷놀이도 이제는 추억 속에만 남아 있다.

 

 

설에 대한 추억에서 세뱃돈이 빠질 수 없다. 큰외삼촌, 작은외삼촌은 은행에 다녔고, 셋째 삼촌은 증권회사에 다녔다. 또 이모 세 분은 모두 한국은행에 다녔다. 그런 탓인지 세뱃돈은 전부 빳빳한 새 지폐였다. 손가락이 베일 것 같은 그 새파란 지폐에서 나던 냄새도 잊을 수 없다.

 

 

설을 두 번씩 쇠던 어린 시절로부터 오랜 세월이 흘렀고 몸도 멀리 떠나와 있다. 문화가 다르고 세대가 다르니 설 풍경이 다른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무엇을 먹고 무엇을 하든 설을 맞이하는 마음은 그대로이다. 외할머니의 따뜻한 떡국을 먹으며 나이를 먹었듯이 올해도 설날 먹는 떡국과 함께 나이테가 하나 늘것이다. 나이뿐만 아니라 내면도 더 원숙해지기를 바란다. 떡국을 풍성하게 만들어주던 고명처럼 인내심,포용력, 통찰력, 창의력 등도 함께 성장하도록 노력
야겠다.

 

 

그리고 외할머니 찹쌀떡을 먹으며 행복하고 안심했던 어릴 적 설날처럼, 근심과 불안을 훌훌 떨쳐 버리고 사랑과 평화가 온 세상에 넘치는 복된 한 해가 되길 바란다. 어려서 받았던 빳빳한 세뱃돈처럼 개인과 기업, 모든 경제가 더욱 튼튼하게 성장하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