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궁춘원(西宮春怨)
04/10/23  

무엇인가를 찾다가 장롱 서랍에서 뜻밖의 물건을 발견했다. 아주 예쁜 곽에 들어 있는 작은 돌 도장이었다. 누군가에게 선물 받았지만 그 누군가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히 중국인 친구 중에 한 사람인데......

크기라야 밑면의 가로, 세로가 각 2cm인 정사각형에 높이가 8cm밖에 안 된다. 까만 돌 도장의 몸체 네 면 가운데 한 면에는 초서체 작은 글자로 무엇인가 새겨져 있었다. 글자가 작기도 하지만 워낙 휘갈겨 쓴 글씨인지라 도저히 읽을 재간이 없었다. 평소 한시를 즐겨 해독하고 난해한 문장도 잘 풀어서 설명해주는 친구에게 사진을 찍어 보내고 해득이 가능한가 물었다. 잠시만 시간을 달라고 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답을 해 왔다.

西宮夜靜百花香(서궁야정백화향) 서궁의 고요한 밤, 꽃향기 그윽한데
欲捲珠簾春恨長(욕권주렴춘한장) 발 걷어 올리려니, 봄의 한(恨) 솟구친다.
斜抱雲和深見月(사포운화심견월) 비파 옆에 껴안고, 한숨 쉬며 달 보니
朦朧樹色隱昭陽(몽롱수색은소양) 몽롱한 나무들이 소양궁을 가린다.

한나라 12대 황제인 성제(成帝)의 총애를 받던 후궁 반첩여(班婕妤)는 조비연(趙飛燕)의 등장으로 황제에게 버림받은 후, 태황태후를 모시고 서궁(장신궁의 별칭)에 살았다. 서궁춘원이라는 제목이 말해주듯이 이 시는 서궁에 사는 반첩여가 어느 봄밤,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는 조비연으로부터 핍박을 받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에 떨면서 한숨짓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참고로 소양궁은 조비연이 살고 있어 임금이 자주 머무는 곳이다.

친구의 답글을 받고 반첩여라는 여인이 궁금해졌다. 반첩여의 본래 이름은 ‘반염’이다. 첩여는 이름이 아니고 비빈의 첩계 중에 하나이다. 반첩여는 성제가 황제에 오른 직후 궁녀로 입궁하여 소사(少使)에 머물다가 황제의 총애를 받아 곧바로 첩여(婕妤)에 책봉된다. 비빈들의 품계는 황후를 제외한 11단계가 있는데 소사는 가장 낮은 11등급의 궁인이고 첩여는 소의(昭儀) 다음의 2 번째 품계로 상경과 열후와 같은 작록을 받았다. 9단계를 한 번에 넘은 것으로 보아 그녀에 대한 성제의 총애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러나 반첩여는 세월이 흘러 미색이 쇠퇴하게 되었다. 조비연과 그 여동생 조합덕이 후비로 입궁하여 성제의 총애를 받게 되면서 그들의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된다.

조비연은 수려한 용모와 유연한 몸매, 출중한 춤 솜씨로 성제의 사랑을 받았다. 조비연은 허황후, 반첩여와 황제의 사랑을 나누어 갖기 싫었다. 황제의 사랑을 등에 업고 이들을 내쫓기 위해 노력했다. 허황후는 폐위되어 소태궁에 연금되었다가 또 다른 죄목이 더해져 독약을 마시게 된다.

결국 반첩여도 허황후처럼 모함을 받고 옥에 갇히게 되었다. 하지만 반첩여는 무기력하게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논어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제가 듣기로, 죽고 사는 것이 명이며 부귀는 하늘에서 내려준다고 하였습니다. 정도를 지켜도 복을 못 받을 수 있는데 사악한 짓을 하면서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귀신이 알고 있다면 신하의 도리에 벗어난 말을 들어주지 않을 것이며, 만약 귀신이 무지하다면 호소한다고 무슨 이득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런 짓은 하지 않았습니다.”라며 성제 앞에서 화와 복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숨김없이 말했다. 죽고 사는 것이 명이며 부귀는 하늘에서 내려주는 바, 인간은 정도를 지킨다 해도 복 받을 것이란 확신이 없는데, 하물며 사악한 짓을 한다면 두말할 나위가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성제는 자신이 심했다고 생각했는지, 황금 1백 근을 내어주며 반첩여를 풀어주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성제는 그 뒤로 반첩여를 찾지 않았다. 반첩여는 상황 파악이 빨랐다. 성제가 비록 풀어주었지만 교만과 질투의 화신인 조 씨 자매가 자신을 가만둘 리 없다고 판단해서 성제에게 장신궁(서궁)에서 태후를 모시겠다고 주청한다.

한편 갑작스런 성제의 죽음으로 조비연과 조합덕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조합덕은 자결하고 조비연은 서민 신분으로 추락했다가 그도 역시 스스로 목숨을 거둔다.

조 씨 자매의 몰락을 배후에서 조정한 사람은 놀랍게도 서궁에서 태황태후를 모시던 반첩여였다. 최후의 승자 반첩여는 홀로 한성제의 능묘를 지키며 그를 추억하는 것으로 일생을 보냈다. 반첩여는 비록 황제의 사랑은 오래 받지 못한 한 많은 여인이었지만 후대 많은 문인들의 사랑을 받는 시인으로 이름이 남았다.

4월의 어느 봄밤, 도장에 새겨진 옛 시인의 시를 해득하며 중국 역사의 한 페이지 속으로 잠시 들어가 보았다.

안창해. 타운뉴스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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