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칼럼
홈으로 발행인 칼럼
부자지간(父子之間)
04/23/18  

제우스의 아버지 크로노스는 아버지 우라노스의 남근을 잘라 낸 뒤에 아버지의 왕좌를 차지했다. 그는 자기 역시 자식에게 권력을 빼앗길 것이라는 아버지의 저주를 잊지 않고 자식들이 태어나자마자 계속 삼켜 버렸다. 그러나 아내 레아의 계책으로 여섯 번째로 낳은 막내아들 제우스를 삼키지 못했다. 결국 성장한 제우스에 의해 삼켰던 자식들을 다 토해내게 되고 그 자식들과의 전쟁에서 패한 뒤 왕위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된다.

 

신화 스토리지만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은 부모와 자식 간에라도 예외가 있을 수 없다는 강력한 메시지로 읽힌다. 권력은 기득권, 특히 경제권을 포함한다.

  

지난해 한국에서 아버지가 아들을 상대로 증여재산 반환 청구소송을 하는 일이 있었다. 아버지는 딸 둘, 아들 하나 3남매를 두었는데 부인과 사별하고 농사일을 하면서 아들을 미국 유학까지 보내주고 결혼시켰다. 그뿐이 아니다. 10억 원 상당의 부동산을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자신이 기거할 아파트 한 채만을 남겨두고 그가 가진 모든 재산을 상속한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기거하던 아파트마저 아들에게 넘기며 아파트를 월세 놓아 매월 100만 원은 자기 통장으로 입금해 달라하고 단칸방을 얻어 생활했다.

 

꼬박꼬박 입금되던 월세가 1년이 지날 무렵부터 들어오지 않았다. 며느리에게 확인하니 아버님이 저희들에게 그냥 쓰라고 하지 않았냐?”고 반문했다. 지난달 아들 부부간에 돈 문제로 다툼이 있어 그러면 월세를 내게 보내지 말고 보태 쓰라고 한 말이 생각이 났다. 며느리에게 다시 돌려 달라는 말은 못했다.

  

자식을 공부시키고 혼인시킨 후에 경제적으로 독립해서 살아 갈 수 있게 해주고 있는 재산까지 다 털어주었으나 아들은 아버지를 돌보지 않았다. 급기야 생활이 어려워진 아버지는 아들을 상대로 증여재산 반환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판결은 아들의 편이었다. 법원은 심정적으로는 아버지의 처지가 이해가 되지만 법의 잣대로는 아버지를 부양한다는 어떠한 증거도 서류상으로 남겨 진 것이 없기 때문에 증여는 정당하다고 판결했다.

 

 위의 사례가 특별한 예라고 지나칠 수도 있다. 내 자식은 그럴 리가 없다고 고개를 흔들 수도 있다. 그러나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자식들이 결혼하여 자기 가정을 지니고 생활하다보면 부모보다 내 아내와 내 자식이 먼저이게 마련이다. 내리 사랑이라 하지 않던가. 아무래도 부모에게 소홀해지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더 이상 나올 것이 없는 아버지라 홀대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 일화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자식을 언제까지나 돌봐야 한다는 의무감에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성인이 된 자식은 스스로 경제적 책임을 지고 자기 가정을 돌보고 살아 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자식에게 경제적 자산을 물려주려고 노력하기보다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자립심과 독립심을 키워주는 것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자식이 부모로부터 독립하려 하지 않는 것이나, 부모가 자식을 떠나보내지 못하는 심리는 모두 분리로 인해 서로가 불안정한 상황에 놓이는 것을 걱정하기 때문이다.

 

자식에게 부모는 안전과 편안함을 제공하는 울타리이다. 하지만 그 울타리는 부모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는 순간 무너질 수 있다. 또 울타리는 자식으로부터 존재를 부정 받는 부모에 의해서도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다. 대부분의 경우는 떠남과 떠나보냄의 관계를 부정하는 데서부터 울타리는 무너지기 시작한다. 무너진 울타리 안에서는 적절한 떠남과 떠나보냄이 이루어질 수 없다. 떠나야할 자와 떠나보내야 할 자가 혼란 속에서 대립하는 가운데 누군가는 권력을 쥐어야하므로 비극마저 탄생할 수 있다.

  

세대는 단절되지 않고 이어진다. 그리고 모든 역사는 이어짐 속에서 만들어진다. 자식 세대는 부모의 울타리 안에서도 언젠가는 독립할 것을, 자신이 주인이 될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

 

프로이드는 부친살해를 다음 세대가 사회적 주체로 등장하기 위한 통과의례라고 말했다. ‘부친살해없이는 새로운 세대의 심리적 독립은 물론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갈 주체도 등장할 수 없다고 했다. 물론 그가 말한 부친살해가 물리적 생명을 빼앗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과거 세대로부터의 탈피 없이는 결코 새로운 세대의 등장을 기대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자식들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크로노스는 세상에서 가장 깊은 곳, 지하의 명계보다 더 아래에 있는 타르타로스에 갇혔다가 제우스와 화해하고 타르타로스에서 풀려나 지복(至福)을 누리는 자들의 섬에서 살았다.

  

지금 이 순간 부모 자식 간에 발생한 불협화음으로 고통 속에 살고 있다면, 건강한 관계 회복을 도모해 아름다운 떠남과 떠나보냄을 이루어야 한다. 그래야 부모와 자식 모두가 행복하고 나아가 그들이 속한 시대와 사회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