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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주년이네요
04/23/18  

날씨가 좋았다. 1마일 정도 되는 은행까지 걸어갔다 오기로 했다. 은행 앞 건널목에 서서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신호가 바뀌었다. 횡단보도로 발을 내디딘 후,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는데 우회전하는 차들이 계속 회전하고 있었다. 반쯤 걸어왔는데도 차들이 빠르게 지나간다. 자동차에 치일까봐 걱정되기 시작한다. 차도의 2/3를 지나 왔는데도 차들은 앞으로 지나갔다.

  

횡단보도에 보행자가 들어서면 일단 회전하려는 차들은 멈춰서 기다려야 한다. 보행자가 다 건널 때까지. 단 보행자가 횡단보도 2/3이상을 건너갔을 경우에 그 뒤로 회전 할 수도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이를 지키는 운전자가 없었다. 모두가 급하다. 여유가 없었다.

  

요즈음은 운동경기에도 여유가 없다. 메이저리그는 빠른 경기 진행을 위해 올해부터 룰의 일부를 바꾸기로 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고의4구와 관련된 규정이다.

  

고의4구란 투수가 타자와의 정면 승부를 피하기 위해 타자가 공을 칠 수 없도록 던지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던진 공이 네 번 볼 판정을 받으면 타자는 1루로 진출한다. 이로 인해 경기 시간이 길어지고 지루해져 사람들의 관심이 야구에서 멀어지고 있다고 판단한 메이저 리그 사무국은 올해부터 감독이 타자를 고의4구로 내보내겠다고 심판에게 사인을 보내면 타자는 타석에 들어서지 않고 바로 1루에 나가도록 룰을 개정했다.

  

하지만 개정된 룰로 인해 포기해야 할 장면들도 있다. 고의4구를 위해 투수가 던진 공이 실투로 이어져 누상에 있던 주자들이 다음 베이스로 진출한다든지 고의4구를 위해 던진 공을 타자가 쫒아가서 친다든지 하는 예기치 못한 흥미로운 상황들이 원천봉쇄된 것이다. 빠르게 경기를 진행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잃어야 하는 것들도 생긴 것이다.

  

메이저리그만이 아니다. 프로 골프도 진행을 빨리 하기 위해 룰을 바꾸기로 했다. 분실구를 찾는데 허용하는 시간이 기존 5분에서 3분으로 줄어든다. 또한 선수들이 공을 치는데 걸리는 시간은 40초를 넘을 수 없다. 만일 40초가 넘게 되면 벌타를 받게 된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그린으로부터 먼 사람부터 공을 쳤는데 앞으로는 먼저 준비한 사람부터 칠 수 있다.

  

이처럼 운동경기의 룰이 바뀌는 것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의 성급함이 반영된 까닭이다. 관중이나 시청자들은 경기가 조금만 지연돼도 기다리려고 하지 않는다. 관중들은 야유를 보내고 시청자들은 리모컨을 찾는다. 그래서 무조건 빨리 빨리 진행해야 한다. 사람들을 경기장으로 불러 모으고, TV 앞에 앉게 만드는 것이 수익과 직결되니 경기 시간 단축을 위한 룰 개정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은행에서 볼 일을 마치고 나와 길을 다시 건너 천천히 걸었다. 돌아오는 길에 우회전 차량을 두 번 만났다. 횡단보도도 없는 좁은 길이다. 대로에서 주택가로 들어가는 길이다. 차가 먼저 가도록 기다렸다. 운전자가 차를 멈추면서 나보고 먼저가라고 했으나 차 먼저 가라고 손짓했다. 그러자 운전자가 고개를 숙여 인사하면서 내 앞을 지나갔다. 나도 덩달아 고개를 숙였다. 기분이 좋았다. 두 번째도 그렇게 했다. 운전자는 손을 흔들며 갔다. 나도 손을 흔들었다. 안전과 더불어 기분도 유쾌해졌다.

  

걷는 도중에 한국에 있는 친구로부터 카톡이 왔다. ‘미국땅 밟은 지 24년 되는 날, 그날을 생각해 보는 하루가 되시길......’뜬금없이 뭔 일인가 궁금해서 물었다‘. 왜 갑자기?’가만히 생각하니 내일이 3월 3일이었다. 1993년 3월 3일 한국을 떠났다. 그리고 같은 날 LA에 도착했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 친구는 작년에도 같은 날 같은 내용의 메시지를 보내왔었다.

  

친구로부터 답신이 왔다‘. LA는 2일 오후이겠군. 초심을 생각하는 하루되시길.’미국에 도착했을 때의 초심이라......미국생활 24년, 가드닝 비즈니스를 하고, 비디오 가게를 하고 학원을 하면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이리 뛰고 저리 뛰던 시절‘. 빨리빨리’를 입에 달고 살았다. 매사에 서둘렀고 허둥댔다. 밥도 무엇에 쫓기듯 허겁지겁 먹었고 자는 것도 아까와 하던 시절이 있었다. 운동경기 룰을 바꿔가면서 경기를‘빨리빨리’진행하듯 삶의 룰을‘바꾸고’‘, 단축하고’‘, 압축했다. 그렇다보니 인생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그로 인해 포기해야만 했던 것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운동도 여유를 가지고 지킬 룰을 다 지켜가면서 천천히 하면 즐거움이 배가 된다. 경쟁이 아니라 즐기기 위해 하는 운동이 되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천천히 걸음을 내디디며 누릴 수 있는 모든 즐거움을 포기하지 말아야겠다. 여유를 가지고 찬찬히 세상을 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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