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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나들이
04/23/18  

지난 주말 봄빛이 따사로운 아침, 손주들과 산책에 나섰다. 푸른 하늘, 뭉게구름, 갓 나온 초록 이파리, 활짝 피어난 꽃들, 봄의 합창소리 요란하다. 평소 무심히 지나쳤던 것들이다. 봄이 한창이었다. 아이들도 봄을 느낄까 생각하는 바로 그때 어머니와의 추억이 떠올랐다. 어머니는 해마다 봄이 오면 어린 아들을 데리고 소풍을 갔다.

  

기억 속에는 없지만 사진으로 추억하는 사진 한 장이 있다. 봄날 어머니와 공원에서 찍은 사진이다. 빛바랜 흑백사진, 그것도 아주 작은 명함판 크기의 사진이지만 그날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그러나 사진 속의 그날에 대한 구체적인 기억은 없다.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창경원이다. 창경원에 동물원이 있던 시절이다. 원숭이, 코끼리, 하마, 낙타, 기린, 사자, 호랑이 등을 휘익 한 바퀴 돌아보고 준비해간 김밥을 먹고 일어날 무렵 찍었으리라. 호수를 배경으로 여동생은 사이다병을 들고 있고, 어머니는 한복을 멋지게 차려입고 예쁜 핸드백을 들고 있다. 아버지가 셔터를 눌렀으리라. 두 분의 셋째와 넷째는 태어나기 전이다. 내가 여섯 살, 여동생이 세 살, 어쩌면 셋째는 당시 어머니의 복중에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사진을 찍었던 시기는 58년의 어느 봄날로 추정된다. 4월이나 5월, 아버지가 31세, 어머니가 29세일 때
다. 그러고 보니 두 청춘남녀는 25살, 23살에 나를 낳았다. 아버지가 25살이면 휴전이 있던 해이다. 당시아버지는 해병대원이었다. 주문진 등대에서 나를 낳았다. 그때 찍은 사진에는 등대 앞에서 포대기에 쌓은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와 그 곁을 지키고 있는 아버지가 담겨 있다.

  

또 다른 사진 한 장, 경복궁에서 엄마와 아들이 잔디밭에 앉아 있다. 호수 위에 떠 있는 경회루가 배경이다. 어머니는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있고 상고머리의 어린아이는 엄숙하게 사진기를 응시하고 있다. 어머니의 표정도 엄숙하긴 마찬가지이다. 앞서 걷고 있는 손주들을 불러 세워 사진을 찍으려 하자 각가지 재미있는 포즈를 취한다. 왜 그 시절 우리들은 사진기 앞에서 엄숙했을까.

  

어머니 혼자 찍은 사진도 한 장 있다. 명함판 2배의 크기이다. 이 사진에 대한 기억은 또렷하다. 부산 동
래 온천에 다른 가족들과 놀러 가서 찍은 사진이다. 사진 속 어머니는 오른손으로 소나무를 잡고 왼편 허리춤에 핸드백을 끼고 있다. 역시 한복을 입었다. 계절도 봄이다. 1960년 초등학교 입학하던 해에 4.19 학생혁명으로 이승만 정부가 무너지고 장면 정부가 들어섰고, 아버지는 부산 세관으로 발령이 나서 내려가게 되었다. 부산으로 가면서 동생 둘만 데려가고 나는 외갓집에 있다가 몇 달 후에 합류했다. 부산에서 초등학교 2학년을 다녔다.

  

그리고 5.16 쿠데타가 터지고 아버지가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으니까, 이 사진은 1961년 봄에 찍은 듯하다.5.16이 나기 직전의 봄, 4월말에서 5월초, 꽃피는 봄날 33살의 아버지와 31살의 어머니는 친구들 가족과 어울려 동래온천으로 봄맞이 소풍을 갔던 것이다. 쿠데타가 터질 줄 까맣게 몰랐을 것이다. 사진은 그날의 기억을 더욱 뚜렷하게 떠올리게 한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이날 찍은 또 다른 사진 한 장을 기억한다. 사진 속의 나는 삶은 달걀을 손에 들고 노래 부르고 있다. 무슨 노래를 불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내 곁에는 창경원 사진에는 없던 아이, 둘째 동생이 서있다. 아직 막내는 태어나기 전이다.

  

그 후로 더 이상의 봄 소풍은 없었다. 사진도 없고, 기억 속에도 없다. 아마도 부산 생활을 접고 서울로 다시 올라와 팍팍한 삶을 사노라 봄나들이 갈 엄두를 내지못 했을 것이다.

 

올 봄, 어머니가 부쩍 그립다. 살아계셨으면 올해 87세가 된다. 어머니는 69세 되던 해인 1999년에 아홉수를 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돌아가신 지 꼭 열여덟 해가 지났다. 그런데 어머니 기일은 기억하면서도 지금껏 어머니 생신을 모르고 살았다. 대충 어느 무렵이라고만 기억할 뿐 정확한 날짜를 기억하지 못 한다. 그래서일까, 단 한 번도 어머니 생신이라고 생일 카드를 드리거나 생일 선물을 드린 적이 없다. 결혼 후에는 아내가 매년 챙겨드렸다. 환갑잔치도 아버지는 호텔을 빌려 일가친척, 친지들 모시고 거하게 해드렸는데 어머니는 따로 해드리지 않았다. 아버지 잔치를 하면서 수저를 얹는 식으로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뒤늦은 후회가 큰물처럼 밀려왔다.

  

어머니를 추억하며 걷는 길에 손주들의 웃음이 봄꽃잎처럼 흩날린다. 아름다운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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