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이별
04/23/18  

지인의 장모님이 당신 장례식장에서‘Take me home country road’를 불러달라고 했다. 지인은 농담으로 넘기려 했으나 장모님이 기회 있을 때마다 신신당부를 하여 약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 달 지인의 장모님이 돌아가셨다. 고인이 30여 년을 넘게 다니던 오렌지카운티의 한 교회에서 장례식이 있었다. 지인은 장모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 노래를 부인과 함께 불렀다.

 

그런데 노래가 끝나자 집례를 맡은 목사가 이런 세속적 팝송을 교회가 주관하는 장례예배에서 불러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자기가 수없이 많은 장례 예배를 집례 했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라며 여러 번 반복해서 불쾌감을 표시했다고 친구는 인터넷 카페에 그 이야기를 올렸다. 다음은 그 글의 끝부분이다.

  

‘장례식 집례를 맡은 목사가 조가를 찬송가나 복음성가가 아닌 곡을 선택했다는 이유로, 조가가 끝난 후에 정색을 하면서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언급을 반복적으로 한 것은 아주 경솔하고 무례한 처사라고 생각한다. 혹시 이런 일이 목사가 가지고 있는 신념에 위배되었다면 예식이 끝난 후에 조용히 가족을 불러 이야기하면 될 일이다. 교회에서 오랫동안 권사로 봉사했으며, 누구에게나 넓고 크게 베풀며 평생을 살아오신 내 장모님의 뜻에 따라 조가의 곡을 선택한 가족으로서는 아주 황당하고 어이없는 일
이 아닐 수 없었다.

  

사람이 살면서 별별 일을 다 겪고 살지만, 이번 일은 참으로 어이없고 황당하다. 물론 상대방은 본인의 믿음과 신조에 입각해서 소신껏 살아왔다고 할 것이고 내가 가진 속성의 신앙은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이지만‘, 기독교회’라는 제도 속의 조직을 멀리하고 있는 상황을 더 확실히 해주는 그런 또 하나의 사건을 만난 것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장모님! 당신 인생의 반평생을 함께 한 사위인 제가 당신께서 떠나시는 길에 평소에 아주 좋아하시는 노래를, 어느 답답한 목사의 눈총을 받으면서까지 불러 드렸으니 개의치 마시고 행복하게 떠나가시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

  

’필자의 장모님이 돌아가셨다는 기별을 받고 처가에서 장례 일정을 진행하던 중에 그 글을 읽었다. 5월 1일(월) 그날은 마침 장모님의 영결예배가 있는 날이었다. 추모사를 해달라는 처형의 부탁을 받았던지라 조가는 아니었지만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어떤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 되는 것이 아니고 혹시 내가 하는 말이 목사님의 철학이나 입장과 어긋나서 그분의 심기를 건드리게 되지 않을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마음을 편히 먹기로 했다. 장모님의 고결한 성품은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
기에 그 부분에 대해 언급하고, 이웃 사랑이나 신앙을 입으로 얘기하기보다 실천으로 보여주신 분이기에 몇 가지 있었던 일을 얘기하기로 마음먹었다.

  

조문객들을 대접하기 위해 식사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목사님이 도착했다. 필자를 기억할까 걱정하며 인사를 했다. 목사님도 반갑게 인사했다. LA에서 오시느라고 고생이 많았다면서 아이들 이름을 부르면서 학교에 잘 다니고 있는가 물었다. 어려서 한두 번 교회에 왔던 아이들 이름을 어떻게 기억한단 말인가. 깜짝 놀랐다. 그날 저녁 한국에 가기 위해 항공권을 이미 끊어 놓은 상태였지만 저녁 7시에 시작하는 장모님의 장례식 집전을 위해 일정을 미뤘다는 말을 처형으로부터 전해 듣고 나서 목사님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은 더욱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목사님은 의식을 진행하던 중에 장모님에 대해 여러 가지 말씀을 많이 하셨다. 그런데 그 대부분이 내가 하려던 말이었다“. 전순희 권사님은 신앙심을 입으로 말하지 않고, 실천으로 보여주신 분입니다. 다달이 LA 딸이 보냈다며 십일조를 꼭 챙기셨고, 매사에 적극적이며 교회 일에 앞장섰고, 가진 것이 넉넉하지 않음에도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셨고, 늘 다른 분들과 화목하게 살았으며, 김치 맛은 가히 일품이었습니다.”실제 있었던 일화를 이야기 했고, 사진과 동영상에 담겨진 장모님의 영상을 보여주면서 조문객들과 함께 장모님을 추모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목사님이 제가 할 말을 다 해주셔서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잘난 척, 있는 척, 아는 척하는 사람들 앞에서 겸손이 무엇인지를 몸소 실천으로 보여주신 분입니다. 손자 손녀들의 생일, 딸과 사위 생일에 잊지 않고 생일카드를 보내 주셨고, 생일카드 속에는 현금 100달러를 꼭 넣어서 보내시는 분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습니다. 한 달에
받는 웰페어와 아파트 페이먼트, 기타 등등의 생활비 등을 생각할 때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장모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장모님은 언제나 밝고 명랑한 분이셨습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을 앞에 두었을 때도 웃음과 희망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그 분을 떠나보내는 슬픈 의식의 자리이지만 우리 모두 즐겁고 유쾌한 마음으로 그분을 보내드립시다. 그 분도 우리의 애통해 하는 모습보다 밝고 환하게 웃는 모습을 좋아 하실 겁니다.”추모사가 끝나자 조문객들은 박수로 화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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