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방동 이발소
04/23/18  

한국에 올 때마다 들르는 이발소가 있다. 매번 묵는 숙소 바로 앞 지하상가에 있는 이 이발소는 이발사가 특별히 머리를 잘 깎는다거나 아니면 특별한 서비스를 해 주는 것도 아니다. 이발사가 친구라거나 혹은 친척도 아니며 특별한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어쩌다 피치 못해 다른 곳에 숙소를 정해야만 할 때에도 지하철을 타거나 버스를 타고 일부러 찾기도 한다.

 

여러 차례 왜 그곳을 찾게 되는가 스스로에게 물어 본 적이 있다. 그때마다 명확한 답을 내리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그때마다 그를 찾아서는 안 되는 이유들만 떠올랐다. 그에게 머리 깎을 때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입에서 냄새가 심하게 난다. 어떨 때는 입냄새에 김치 냄새가 섞여 그가 숨을 쉴 때마다 속이 울렁거릴 지경이었다.

  

머리도 감겨 주지 않는다. 각자가 알아서 감으라고 매직으로 크게‘셀프’라고 쓴 두꺼운 종이를 벽에 붙여 놓았다. 수도꼭지에 물이 샤워기처럼 나오게 쏘옥 나온 대롱을 달아 놓고 손잡이를 돌려 더운 물, 찬 물의 비율을 각자의 취향에 맞게 섞어 쓸 수 있도록 해놓았다. 머리를 감은 다음에는 수건이 잔뜩 들은 통에서 하나 꺼낸 후 머리의 물기를 닦고 있으면 이발을 하다 말고 머리 깍고 있던 손님에게 양해도 구하지 않고 머리 말리는 사람을 앉으라 하고 드라이기로 말려 준다.

  

아버지 장례식을 위해 지난 14일 새벽에 한국에 도착해서 대방동 성당에 아버지를 모셔 놓고 문 여는 시간에 맞춰 이발소를 찾았다. 문이 열려 있었다. 그런데 이발소에 들어서서 한참을 기다렸다. 이발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참을 더 기다렸다. 잠시 어디 외출한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냥 나올까 하다가 문득 의자를 보니 하얀 종이에 무언가 쓰여 있었다‘. 용무가 있으신 분은 전화주십시오’라는 메모와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무작정 기다리고 있었다니. 황당하면서도 조금 언짢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고 마음먹고 들렀는데 머리를 깎지 않고 그냥 나올 수는 없었다.

  

전화를 거니 이발사가 받는다. 자기는 지금 병원에 있다면서 병원 진료를 마치려면 1시간 이상이 걸릴수도 있으니 내일 다시 오라고 했다. 너무 자기 위주로만 생각한 것 같아 불쾌한 느낌까지 밀려왔다. 그에게 머리를 깎기 위해 1시간 이상을 기다릴 순 없었다. 조문객들이 몰려 올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다음날 아침 일찍 다시 이발소를 찾았다. 그는 머리를 빡빡 깎은 모습이었다. 아니 머리를 왜 그렇게 빡빡 밀었냐고 물으니 날도 덥고 해서 거울을 보고 스스로 깎았다고 했다.

  

어제 왔더니 안 계셔서 시키는 대로 전화했더니 병원이라고 해서 돌아갔었다고 하자 미안하다거나 죄송하다는 말도 없이 대꾸는 아! 그랬냐는 한 마디였다. 뭐 대수로운 것이 아니라는 반응이다.

  

난 다시 묻는다. 왜 나는 이 이발소를 찾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찾지 말아야 할 이유 외에 더 떠오르는 것이 없다. 이발소의 시설이나 서비스는 다른 이발소에 비해 열악하면 열악했지 더 나을 것이 없고, 그렇다고 이발사의 이발 실력이 탁월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내가 이 이발소에 발길을 끊지 못 하는 이유는 외형적인 것에 있지 않음이 분명하다.

 

그러고 보니 이 이발소는 내가 어렸을 적 한국에서 다니던 그 이발소와 너무도 닮아 있다. 이발소에서 볼 수 있는 특유의 이발소 의자하며 사각사각 가위질 소리와 함께 잘려나가는 머리카락, 뜨거운 물수건을 덮어 쓰고 수염이 부드러워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거품을 발라 삭삭 수염을 깎고 그 잔재를 화장지로 쓱쓱 닦아내는 모습. 과거 한국에 살던 시절 다니던 그 이발소의 모습과 흡사하다.

  

그러고 보면 나는 이발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어쩌면 추억을 찾아 즐기기 위해 이 이발소를 찾고 있는 것이 아닌지.

  

추억은 대부분 아름다움으로 장식되고 내 정체성을 결정한다. 미국에 살면서도 한국 음식을 멀리하지 못 한 것처럼 내 삶의 정체성은 결국 한국에서의 추억 속에서 있는 것이란 생각이 밀려와 어제의 기다림에 조금 언짢아졌던 마음이 눈 녹듯이 풀리는 느낌이다.

  

머리를 깎고 홀가분히 이발소를 나섰다. 아버지의 장례식 장소로 걸음을 옮기며 생각한다. 이제는 아버지도 추억과 기억의 세계로 옮겨 가셨다. 추억이 나의 정체성을 이루었듯이 나라는 인간을 이 세상에 있게 한 아버지를 이제 즐겁고 행복하게 보내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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