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여행
04/23/18  
고성 통일전망대에 다녀왔다. 오는 길에 설악산 권금성 산장을 케이블카로 올랐고, 비선대까지 걸었다. 절기는 가을이라지만 늦더위가 기승을 부려 단풍구경을 하리라는 기대는 산산이 무너졌다. 
 
 
평일이라 사람이 많지는 않았으나 권금성으로 오르는 케이블카에는 단체 관광을 온 십여 명과 함께 탔다. 안내원이 권금성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는데 한 사람이 계속 간밤에 있었던 자기들끼리의 이야기를 하며 소란을 떨었다. 참지 못하고 조용히 해달라고 했다. 그 사람은 죄송하다며 정중히 사과했다.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혹시 단체로 온 사람들이 떼거리로 달려들면 어떡하나. 가만히 있을 걸 왜 나섰나.’케이블카에서 내려서 한 동안 주위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걸었다. 별 이상 징후를 발견하지 못했다. 잠시 후 모든 걸 잊어버렸다. 금방 잊어버리는 편리한 성격, 이럴 때는 참 도움이 된다.
 
 
봉평 이효석문학관에 들렀고 장터도 돌아보고 물레방아도 찾았다. 이효석의 생애를 보니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짧은 삶을 살다 가면서 많은 작품을 남긴 것을 보면 그의 필력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이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 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한국어의 우수성이 유감없이 드러난 이 글을 읽으며 숨죽이지 않는 이는 없으리라. 그의 작품을 읽은 지가 너무 오래 되어 이렇게 수려한 문장을 사용했는지 잊고 있었다.
이렇게 문학관을 건립해 세상을 떠난 문인의 발자취를 기리는 것이 참 의미 있고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의 유려한 문장이 영원히 기억되는 길이기도 하다.
 
 
오대산 월정사와 상원사에도 들렸다. 대학시절의 은사인 탄허 스님의 묘비를 찾아 인사 드렸다. 상원사로 가는 대로의 오른쪽 계단으로 오르는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몇 걸음 더 걸어야 하는지라 사람들이 찾지 않아 스님과 오붓한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추억은 기억력에 의존하기는 하나 기억이 전부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기억으로 꺼내오지 못했던 많은 것들이 탄허 스님의 비석 앞에 서니 철썩이는 파도처럼 밀려오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대학시절 2년 동안 매주 2시간 씩 가부좌를 틀고 앉아 탄허 스님의 강의를 들었다. 스님은 두 시간 중에 한 시간은 강의를 했고, 한 시간은 좌선을 시켰다. 점심 먹고 한참 졸음이 몰려오는 시간에 우리들은 졸기 일쑤였다. 스님도 우리들과 함께 졸았다. 스님이 즐겨 쓰던 말,‘똥물에 튀길 놈’까맣게 잊고 있었다. 스님은 우리들에게 쓴 소리를 할 때마다 이 말을 즐겨 사용했다. 스님의 죽비소리가 산야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리고 영동군청에 들려 문화체육정책실의 서종석 문화예술팀장을 만났다. 지난해 11월에 만나고 10개월 만이다. 서 팀장은 지난번에 기증한 고원 전집을 상세히 읽었다면서 여러 경로를 통해 고원 선생님에 대해 조사해보니 매우 훌륭한 시인임을 알게 되었다며 시비 건립 부지를 선정하여 알려주겠다고 했다. 아울러 2019년에 완공되는 영동 문학관에 고원 선생을 비중 있게 모시겠다는 약속도 했다.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했으면서도 그분의 시인으로서의 면모를 닮고 배우려고만 했지 그분의 시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리고 타인으로부터 스승에 대한 찬사를 들으며 얼마나 훌륭한 분에게 가르침을 받았는지 깨닫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한 제자임에 틀림없다.
 
 
선생님은‘오늘은 멀고’라는 시에서 꿈을 노래했다. 80이 넘어 만난 학생들에게도 선생님은 꿈에 대해 이야기했다. 당신이 꾸는 꿈은 결코 허황되지 않았다. 오늘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내게 주어진 의무와 책무, 그리고 내일로 향하는 의지!
 
 
꿈은 꾸는 자의 것이다. 허황된 것은 꿈이 될 수 없다. 스승을 기억하고 기리기 위해 10주기에는 선생님의 고향 땅에서 당신께서 이룩한 오늘과 내일의 모습을 담은 시비를 볼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이제 새로 건립되는 영동 문학관에 전시할 스승을 기리는 많은 자료들을 모아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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