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fe Deposit Box
04/23/18  

4~5년 전 일이다. 사회보장국으로부터 매달 일정금액을 지원받는 아버지를 위해서 나와 아버지 공동 명의로 은행 어카운트를 개설해야 했다. 연세가 많아서 아버지가 어카운트를 관리할 수 없기 때문에 아들인 나와 조인트로 하라는 사회보장국의 요청에 따른 것이다.

 

Bank of America 부에나파크 지점을 찾았다. 구좌를 개설하고 일어서는데 은행직원이 Safe Deposit Box를 만들어보라 권했다. 공짜라고 했다. 영화에서나 보던 것을 나도 갖는다. 그것도 공짜로. 마음이 동했다. 외상이면 소도 잡아먹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나 만들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작은 박스는 공짜고 큰 박스는 약간의 돈을 내야 한다고 했다. 별로 쓸 일도 없거니와 돈을 내면서까지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 작은 것으로 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까맣게 잊고 살았다.

 

2016년 12월경, Bank of America로부터 지금까지는 공짜였지만 앞으로는 Safe Deposit Box를 이용하는 사람에게 사용료를 받겠다는 편지가 왔다. 사용하지도 않는 박스를 갖기 위해 1년에 60달러를 지불할 이유는 없었다. 해약하기로 했다. 그러나 집안 구석구석을 아무리 찾아도 열쇠를 발견할 수 없었다.

 

은행으로 뛰어갔다. 젊은 한인 직원이 친절하게 도와주었다. 해약을 원하는데 열쇠가 없다고 하니 그럼 박스를 강제로 열기 위해 Locksmith를 불러야 한다고 하면서 약속을 잡은 다음에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아울러 Locksmith를 부르는 비용은 내가 부담해야 한다고 했다. 얼마냐고 물으니 150달러라며 한 달 반 안에 날을 잡아서 연락하겠노라고 했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나고, 두 달, 석 달이 지나도 연락이 없었다.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7개월여가 지난 7월, 딸과 함께 Bank of America 부에나파크 지점을 찾을 일이 있었다. 마침 먼저 만났던 그 직원이 딸의 일을 도와주겠다며 나왔다. 딸이 용건을 다 마친 뒤에 그에게 ''지난번에 Safe Deposit Box 해약 때문에 만난 적이 있는데 기억하냐''고 물었다. 그는 기억한다면서 연락을 드리지 못해 죄송하다고 했다. 다시 Locksmith와 연락해서 날을 잡아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한 달 안에 날을 잡겠다면서 다음 주 중에 정확한 날을 잡아 알려주겠다고 했다.

  

며칠 뒤에 전화가 왔다. 아직 Locksmith하고 약속을 잡지 못했다면서 다시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또 감감 무소식이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그렇게 찾으려고 애썼던 Safe Deposit Box 키를 발견하였다. 키는 은행에서 준 봉투 안에 그대로 담긴 채 잘 사용하지 않는 가방 속에 잠자고 있었다.

  

Safe Deposit Box 해약을 위해 은행으로 갔다. 밀린 돈 70달러를 먼저 내야한다고 했다. 1년치 Safe Deposit Box 사용비용 60달러와 연체료 10달러가 포함된 것이었다. 키를 찾기 전 Locksmith가 와서 자물쇠를 부수고 열었으면 150달러를 내야 했을 텐데, 은행 직원의 무관심 덕분에 70달러만 내고 Safe Deposit Box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오히려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Safe Deposit Box 안에 분명히 무엇인가 대단한 것을 넣어 두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감도 밀려왔다.

 

은행 직원이 내가 가지고 간 열쇠와 은행 측에서 보관하고 있던 열쇠 두 개를 꼽으니 Safe Deposit Box가 열렸다. 직원은 통을 꺼내 내게 주었다. 밝은 곳으로 자리를 옮겨 기대와 설렘 속에 통을 열었다. 하지만 거기엔 아무 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 무엇인가 넣어두었다고 생각한 것은 착각이었다. 몇 가지 서류에 사인하고 나서야 신경 쓰였던 Safe Deposit Box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마음이 탐욕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중생들이 무거운 짐을 지게 된다. 탐욕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한 무거운 짐을 벗을 수는 없다. 짐을 지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병이요, 짐을 벗어버리는 것은 최상의 즐거움이니 무거운 짐을 버릴지언정 새 짐을 만들지 말라.”

 

불교의 경전 가운데 하나인 증일아함경에 나오는 말이다. 공짜라고 좋아하며 필요 없는 욕심을 부린 결과 나는 결국 마음고생만으로도 모자라 많지 않은 돈이지만 재물까지 잃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이제부터라도 채워서 짐을 지기보다 비우고 벗어버리는 즐거움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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