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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광훈 신부
04/23/18  |  조회:109  

한국 방문 길에 고교 동창생들의 기독인 모임에 초대를 받았다. 신교, 구교 구별하지 않고 기독교인들끼리 모여 친목을 도모하는 하는 모임이었다. 모임에 나온 목사, 장로, 성공회 사제 등 대부분은 졸업 후 처음 만나는 친구들이었다. 간단하게 종교의식을 행하고 각자의 근황을 돌아가며 얘기했다. 한 사람씩 돌아가며 신앙생활, 가족들 이야기를 비롯해 살아 온 이야기들을 나눴다. 모임 장소인 성공회 동대문 성당 본당 신부인 석광훈의 차례가 되었다. 그는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나와 함께 다녔다.

 
“여러분은 내가 신부가 된 것이 신기할 겁니다. 어떻게 말더듬이가 신부가 될 수 있었을까요? 사실 저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중학교 입학할 때까지 말을 더듬는 것 때문에 열등감에 휩싸여 살았습니다.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내게 질문을 할까봐 두려웠습니다. 아무리 더듬지 않으려 해도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단어들은 허공으로 흩어져 떠돌아 다녔습니다. 아이들이 모두 웃었습니다. 나를 놀리던 친구도, 말더듬이라고 바보 취급을 했던 친구도 있었습니다. 때문에 학교
에 가기도 싫었습니다.

 
중학교에 입학해서 우연히 그리스의 말더듬이 웅변가 데모스테네스에 관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웅변학원을 찾아갔습니다. 그 후 내 인생이 달라졌습니다. 나는 말더듬이에서 벗어나며 자신감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대학을 마치고 대기업에 취직해서 다녔습니다. 내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성공회 신학대학에 가서 공부했고 성공회 신부로 평생 봉직했습니다. 은퇴를 몇 해 앞두고 있습니다.”

 

 

석 신부의 말이 끝나자 친구들은 모두 박수를 쳤다. 자신의 단점을 극복한 그의 용기에 대한 박수였고, 학창시절, 그가 학교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던 것에 대한 위로의 박수였다.

  

그 시절을 생각하면 추억이 어디 한두 가지로 그칠수 있을까. 중학교에 입학하고 보니 초등학교 때와는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한 선생님이 국어, 산수, 사회, 자연에서 음악, 체육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목을 가르치지 않고 과목마다 다른 담당 선생님이 따로 있는 것이 신기했다. 교내에 빵이며 음료수를 사 먹을 수 있는 매점도 있었다. 쉬는 시간 10분 동안 교실에서 멀리 떨어진 매점까지 뛰어가 빵이나 도넛츠를 사먹고 오는 재미는 중학생이 되어 누리는 학교생활의 큰 즐거움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 삼립 버터빵도 맛있었고, 달콤한 설탕을 살짝 두른 팥도넛츠 또한 일품이었다.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웅변대회가 열렸다. 반공을 주제로 한 것으로 보아 6월 25일 전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 반에서 두 명이 나가게 되었다. 석광훈과 나. 우리는 석광훈을 쇳가루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소리의 유사성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리라. 말 더듬이 석광훈이 웅변대회에 나간다고 하니까 다들 이해 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아니 그를 넘어 비웃음과 조롱 섞인 말도 한 마디씩은 했던 것 같다. 나역시 광훈이가 웅변대회에 나간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난 열심히 원고를 외웠고, 나름대로 제스처도 만들었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하늘을 향해 쫙 뻗으며 손가락을 모두 펴서 청중의 박수를 유도하는 동작도 만들어 내고, 북한 공산당을 때려잡아야 한다고 열변을 토할 때는 단상을 내리친다는 계획도 세웠다. 드디어 웅변대회가 열렸다. 각 학급에서 뽑힌 연사들이 단상을 오르내리며 반공을 국시로 하는 조국의 정통성과 북한의 폭력성을 폭로했다. 평화통일을 위한 염원들을 토해 냈다. 드디어 광훈이의 차례가 되었다. 연단에 선 광훈이는 내가 알던 광훈이가 아니었다.

  

연설을 하는 내내 그는 한 번도 말을 더듬지 않았다. 단어 하나하나,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분명하게 또박 또박 연설을 이어갔다. 대중 앞에 서 이야기하는 것이 처음이었을 텐데 그에게서는 떠는 모습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절제되고 세련된 제스처도 청중들의 호응을 얻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훌륭한 웅변이었다.

  

입상자들이 발표됐다. 3등, 2등이 호명되고 1등만 남아 있었다. 난 내심 내가 1등일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1등은 광훈이었다. 광훈이와 나는 같은 고등학교에 입학했지만 같은 반을 한 적도 없었고, 자주 어울리지도 않았다. 그래서 졸업 후에도 그가 어떻게 지내는지 무관심했다. 세월
이 한참 흐른 뒤에 성공회 신부가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박수 소리가 잦아들자 한 친구가 광훈이에게 물었다. “은퇴 후에 어떤 계획이 있는가?”광훈이는 자신이 젊은 시절 근무했던 강화도로 돌아가 외롭게 살고 있는 노인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며 살겠다고 말했다. 어릴 때의 컴플렉스를 극복하고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개척한 그 친구라면 그 누구보다도 사회에서 소외된 자를 이해하며 따뜻이 감싸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한 번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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