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
04/23/18  

친구가 김장을 담갔다며 SNS로 근황을 전해왔다. 김장할 배추 150포기를 나르고 씻는 일부터 배춧속 버무리는 일까지 자신의 손길이 안 간 데가 없을 만큼 힘들여 김장을 했다며 그 모습을 찍은 사진까지 보내왔다. 사진을 보면서 친구가 김장하는 일에 손을 보탰다고는 하지만, 김장의 대부분은 그의 부인의 손끝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나 지금이나 집안일은 크든 작든 여자들의 손길이 가야 모양새가 났으니 말이다. 더구나 친구의 부인은 집안일이며 남편 내조하는 일에 소홀함이 없는 성품인지라 아무리 친구가 김장에 일조했다고 해도 단언컨대 열에 아홉은 그의 부인의 몫이 었을 것이다.

  

친구에게 무심코 자네가 담근 김치에 밥 한 술 먹고 싶다고 하니 한국에 올 때 들리라고 했다. 그리고 시골집에 며칠 묵어가라고 했다“. 자네 부인 고생시킬 것 같아 가지 않겠다.”고 하니 동기생들을 불러 우리끼리 밥도 해먹고 지내자고 했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어머니는 시름에 젖었다. 김장 걱정 때문이었다. 넉넉하지 않은 살림이었던지라 어머니는 여섯 식구가 겨울을 나는 동안 먹어야 할 김장을‘조금이라도 돈을 덜 들이고 어떻게 맛있게 할 것인가’로 늘 고민했다. 어머니는 늘 올해는 큰 추위가 오기 전에 김장을 해야겠다고 말했지만, 혹시라도 배춧값이 더 떨어지지 않을까 망설이다가 결국은 한파가 밀려온 뒤에야 부랴부랴 김장을 하곤 했다.

  

어머니는 김장을 위해 봄철에는 젓갈을 담가 두었고, 초가을에는 고추와 마늘을 사두었다. 그리고 입동이 지나면 배추와 무를 비롯해 소로 사용할 미나리며 갓, 마늘, 파, 생강 등을 구입하였다. 김장을 위해 1년을 준비한 것이다.

  

김장하는 날이면 온 집안이 들썩들썩 했다. 당시 김장은 겨울을 나기 위한 통과의례와 같은 것이었고, 어느 집이든지 100포기 정도는 하던 때였으니, 동네 아낙들은 김장하는 일에 품앗이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래서 김장하는 집에는 동네 아낙들이 모여 김장도 돕고 서방 흉도 보고, 자식 자랑도 하면서 유난히 크게 웃던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담장을 넘곤 했었다.

  

이렇게 김장하는 날의 주인공은 두말할 것도 없이 아녀자들이었지만, 아이들에게도 그날은 매우 특별한 날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김장하는 아낙네들 곁에서 쭈뼛거리고 있노라면 어머니 혹은 누구든 절여진 배추 속잎에 갖은 양념으로 버무린 소를 넣어 입 안 가득 넣어주곤 했기 때문이다. 그 황홀한 맛에 차마 김장하는 아낙네들 곁을 떠나지 못하고 있노라면 또 다시 한 입, 또 다시 한 입. 그렇게 짭짤한 배추쌈을 배불리 먹고 나면 결국 갈증이 나거나 속탈이 나기 마련이어서, 밤새 목마름에 시달리거나 뒷간을 드나들어야만 했다.

  

하지만 김장하는 날의 하이라이트는 뭐니 뭐니 해도 잘 삶아진 돼지고기 수육을 소와 더불어 절여진 배춧잎에 싸 먹는 일이었다. 조금 과장하자면 혀까지 함께 넘어갈 것만 같았던 그 맛과 비교할 맛은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다고 어찌 좋은 일만 있었을까.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꽁꽁 언 땅을 파고 김장독을 묻는 일은 언제나 내 차지였다. 김장을 담그기 며칠 전 학교에서 돌아오면 어머니는 김장독 묻을 장소를 가리키며 땅을 파놓으라고 했다. 파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땅속에 묻은 김장독이 추위에 얼어 깨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구덩이 속을 가마니로 둘러야 했다. 또 이른 봄에 먹을 김치는 독 뚜껑을 닫은 후에 그 위를 흙으로 덮었다. 이 모든 것이 어머니의 지휘 아래 이루어졌다. 어머니의 계산된 준비와 가족을 향한 사랑이 긴 겨울 동안에도 가족들에게 감칠맛 나는 김치를 먹을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2013년 5월, 유네스코는 한국의 김장문화를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했다. 김장은 가족이나 이웃 등 공동체가 함께 벌이는 축제와 같은 연중행사로,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인류의 귀중한 문화 자산이라는 이유에서이다. 또 미국 건강 전문지‘헬스’는 세계 5대 건강식품을 소개하면서 김치를 4위에 올려놓았다. 여기에는 스페인 올리브유, 그리스 요구르트, 일본 낫토, 인도의 린틸콩도 이름을 올렸다.

  

한국 사람들이 언제부터 김장을 하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고려시대 이규보의 문집인‘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무를 소금에 절여서 구동지에 대비한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최소한 그 이전부터 김장을 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김장은 1,000년이란 세월 동안 한국 여자들의 손끝에서 이어져 오고 있는 보배로운 정신적, 물질적 자산임
이 분명하다.

  

김장은 한국인의 혼이 담겨 있는 의식 같은 일이다. LA에서 김장할 일은 없겠지만 김장하는 마음으로 주위를 다독이며 보다 풍성한 연말을 맞이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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