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
04/23/18  

점심식사를 마치고 잠시 걷기로 했다. 3월에 들어섰으니 봄볕이 따스할 것이라 생각했다. 회사 울타리를 벗어나 몇 발자국 떼면서 후회했다. 바람이 아직 차다. 그렇다고 돌아가 자동차를 타고 움직이긴 싫었다. 조금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바람은 차지만 볕이 따가워 얼굴은 금세 빨갛게 달아오른다. 팔을 휘저으며 빠른 걸음으로 걷다보니 땀도 난다.

잠깐 집 앞에 나가는데도 두터운 외투를 걸치고 모자를 써야 했던 일주일 전의 서울이 생각났다. 정말 추웠다. 미국으로 돌아오기 전날 제법 풀린 날씨를 외면하지 못하고 북한산을 찾았다. 그러나 그날도 히말라야에서 입었던 오리털 파카를 입어야 했다.

참으로 축복받은 곳에 산다. 팔을 힘차게 저으며 걸었다. 바로 그때 한국에서 만났던 사람들이 던진 물음이 떠올랐다. 미국인들은 한반도 상황을 보면서 곧 전쟁이 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트럼프 대통령의 망언과 예측할 수 없는 돌발적인 행동들을 미국인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리고 답하기 위해 입을 열려고 하면 스스로 자기 질문에 답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답은 천편일률적이었다. 사업상 만났던 분들, 대학 동창생들, 고교 동창생들, 제자들, 심지어 지난해 8월에 귀국한 딸도 그랬다. 그들은 한결같이 절대로 한반도에서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은 물론 전세계를 위험에 빠트리고 있다고 말했다.


한반도의 불안한 현실에 대해 우려하고 있는 한반도 밖의 시선과는 상관없이 그들은 북한의 시위와 위협, 그리고 화해를 위한 제스처까지 늘 북한이 그래왔던 것처럼 매우 정상적인 일련의 액션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트럼프의 외교적인 행동과 경제적인 조처 등은 그가 비정상적인 사람이라는 증거라면서 그의 뇌를 검사해야 한다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과연 그럴까?

세계는 요동치고 있다. 2012년 1월 미 국방부가 발표한 새로운 국방전략지침의 요지는‘오프쇼어 밸런싱 전략’이다. 이 전략은 미군이 동아시아 지역의 동맹국에서 서서히 철수해 괌, 하와이, 앵커리지를 거점으로 활동한다. 유사시 동맹국에 미군이 병력과 무기를 지원하지만, 평상시에는 미국의 동맹국인 일본이 중국을 억제하고, 한국은 북한을 억제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2014년 4월, 당시 오바마 대통령은 일본을 방문해서“센카쿠 제도의 방위는 미·일 안보에 포함된다.”고 말했다. 2015년 10월 이후에는 중국의 남중국해 군사 요새화를 저지하는‘항행의 자유작전’을 감행하기도 했다. 또한, 한국군과의 한미 합동 군사훈련 규모도 확대하는 등 오히려 한국과 일본의 안보 문제에 깊숙이 관여하기 시작하면서‘오프쇼어 밸런싱 전략’이 여전히 유효한지에 대해 의구심이 들게 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의 집권으로‘오프쇼어 밸런싱 전략’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심지어 일본이‘중국이 남중국해에서 군사 요새화에 매진하고 있으며, 이점이 아시아 지역의 큰 걱정거리가 되고 있다’고 하자, 미국은 일본에 이렇게 물었다‘. 걱정거리라면서 왜 남중국해에 군대를 파견하지 않는가? 왜 태평양 반대편에 있는 미국 군대에만 의지하려고 하는가?’일본의 존립이 위협받고 일본 국민의 권리가 기본적으로 위협받으면 자위대 군사력이 직접 개입한다는, 2015년에 참의원을 통과한 일본 안보법을 염두에 두고 한 발언이었을 것이다.

동아시아에는‘4개의 화약고’가 있다. 한반도, 센카쿠제도, 대만 해협, 남중국해가 그것이다. 이들 지역에서는 매일 불꽃이 일고 있지만 아직까지 큰 폭발로 이어지지는 않고 있다. 미국이라고 하는‘세계의 보안관’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미국은) 세계의 경찰관이기를 포기한다.”고 공언했다. 이에 따라 미국의 안보 울타리에서 안주하던 한국과 일본의 안보 위험은 커지고, 나아가 아시아를 묶고 있던 미국 중심의 안보 사슬은 느슨해질 것이 불 보듯 뻔하다. 이런데도 한반도의 현 상황이 우려할 만한 것이 아니라고, 아니 지극히 정상적이라고 강변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다행히 평창 동계올림릭을 계기로 남북 간에 화해의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지금 한반도에서 일고 있는 남과 북의 화해 분위기는 미국과 북한의 대화와 화해가 선행되지 않는 한 결코 정착될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한반도와 미국, 또 세계 평화를 위해 풀어야 할 실타래는 얽히고설켜 있다. 이 실타래를 대한민국을 비롯해 미국과 북한, 또 관련국 지도자들이 어떻게 풀어갈지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돌아오는 길, 더 이상 바람은 차지 않았다. 바람은 훈풍으로 바뀌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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