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투만두공항에서
04/23/18  

카트만두공항에서 싱가폴행 비행기의 탑승을 기다리며 졸고 있었다. 북경에서 시작해서 티벳을 거쳐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까지 갔다가 네팔 국경을 넘어왔다. 10여 일 동안 해발 3500미터에서 5300미터의 고산지대를 넘나드는 긴 여행을 마친 뒤였으니 심신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갑자기 의자가 크게 흔들려 졸음이 확 가셨다. 의자는 앞뒤로 두 자리가 붙어 있었는데 뒤 의자에 앉아 있던 사람이 일어나자 내가 앉아있던 의자가 흔들린 것이다. 잠이 확 달아났다. 정신을 차려 보니 네팔 젊은이 둘이 나를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순진한 얼굴들이다. 나도 그들을 쳐다보며 웃었다.

 

다시 잠을 청하려고 하는데 앞에 있던 한 젊은이가 손에 들고 있던 비닐봉지를 불쑥 내밀었다. 얼떨결에 받았다. 뭔가 보고 돌려줄 생각에 봉지 안을 들여다보니 라면이 들어 있었다. 자기들이 먹으려고 라면을 부숴 스프를 섞고 있던 것을 내게 건넨 것이다. 내 모습이 측은해 보였나 보다. 하긴 내 행색이 남루하기는 했다. 고산증으로 심하게 고생했으니 몰골이 궁색해 보였을것이다. 살도 5~6Kg 이상 빠져 있었다.

 

난 괜찮다며 돌려주니 또 있다며 새 것을 꺼내 먹기좋게 부수고 거기에 다시 스프를 섞으며 말했다. 굉장히 배가 고프다고. 그럼“이것도 먹으라.”며 그들이 내게 주었던 라면을 다시 내미니 극구 사양하고 새로 부순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공항 안의 매점으로 갔다. 샌드위치와 크고 맛있게 생긴 초콜릿바, 음료수 등을 샀다. 두 젊은이에게 골고루 나눠 주면서 먹으라고 했다.

 

그들은‘고맙다’는 한마디 말을 남기고 샌드위치 하나를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웠다. 한 젊은이가 다시 초콜릿바를 먹기 시작했다. 다른 젊은이는 초콜릿바를 내게 내밀면서 먹으라고 권했다. 내가 사양하자 초콜릿바를 자기 가방에 넣더니 라면을 꺼내서 다시 내밀었다. 아까와 똑 같은 라면이었다. 아무리 사양을 해도 막무가내였다. 할 수 없이 또 하나의 라면을 받아 가방 속에 넣었다. 왜 초콜릿을 먹지 않느냐고 물으니 집에 있는 딸에게 갖다 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지금 일거리를 찾아 중동으로 가는 길이라며 그곳에서 1년 정도 머무를 것이라고 했다. 그럼 초콜릿이 다 녹기 때문에 딸에게 갖다 줄 수 없을 거라고 하자 두어 달 있다가 네팔의 큰 명절이 있어 잠시 집에 다니러 올 것이라고 말했다.

 

비행기 탑승 시간이 돼 짐을 챙겨 일어났다. 네팔의 젊은이들이 샌드위치와 초콜릿을 주어 정말 고맙다고 다시 감사의 인사를 했다. 작별인사를 나누고 서로의 행운을 빌면서 게이트로 향했다. 네팔의 두 젊은이들은 왜 나에게 부순 라면을 건넸을까? 난 또 왜 그들을 위해 샌드위치며 음료수, 초콜릿 등을 샀던 것일까? 누구랄 것도 없이 서로가 서로를 측은하게 여겼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유학경전 4서 가운데 하나인‘맹자’의 공손추편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고, 부끄러운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사양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옳고 그름을 아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어짐의 시작이고(惻隱之心 仁之端也, 측은지심 인지단야),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은 옳음의 시작이고(羞惡之心 義之端也, 수오지심 의지단야), 사양하는 마음은 예절의 시작이고(辭讓之心 禮之端也, 사양지심 예지단야), 옳고 그름을 아는 마음은 지혜의 시작이다(是非之心 智之端也, 시비지심 지지단야).”

 

그러면서 맹자는“사람들에게 이 사단이 있음은 사람들에게‘팔, 다리, 머리, 몸’의 사지(四肢)가 있음과 같다.” 라며“, 이 사단이 있으나 스스로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해치는 사람이다.”라고 덧붙였다.

 

사단은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근본이 되는 성질 즉, 본성(本性)이다. 본성의 성(性)은 마음 심(心)과 날생(生)이 합쳐져 만들어진 글자로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갖추어지는 마음을 뜻한다.

 

요즘 한국 사회를 휩쓸고 있는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며 우리 시대가 본성을 잃어버리고 본능 혹은 욕망만이 가득한 큰 독 속에 갇혀 살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강자는 약자를 측은히 여기기보다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한 도구로 삼고, 자신의 허물을 부끄러워하기보다 다른 사람의 허물을 들춰내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겸허한 사양보다 부정하게라도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들고, 시비를 가리려 들기보다 뻔한 비리를 감추며 다른 사람은 물론 스스로를 해치며 살아오고 있지 않은가.

 

기원전 4세기 무렵 맹자가 했던 말들이 수천 년이 지난 오늘 더욱 아프게 다가오고, 네팔 젊은이들의 때 묻지 않은 웃음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 것은 다 이런 이유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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