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거나
04/23/18  

두 친구와 점심을 함께 하기로 했다“. 메뉴는 무엇으로 할까?”물었더니 둘 다 특정 음식을 말하지 않고“아무거나!”라고 대답했다. 친구들은 결정권을 나에게 넘긴 것이다. 그래서“염소탕은 어떠냐?”고 물으니 모두좋다고 했다.

 

친구들을 만나 염소전골을 주문했다. 세 사람이 탕을 각각 하나씩 먹으나 전골을 시켜 먹으나 가격은 비슷했다. 친구들과 그간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음식이 나왔다. 먹음직스러웠다. 그러나 한 친구는 염소전골은 쳐다보지도 않고 다른 반찬과 함께 밥을 먹고 있었다. 먹고 싶지 않으나 친구들이 원하니 그 의견을 따른 것이다. 음식을 주문할 때라도 원하는 것을 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늘 이런 의문이 있었다. 왜 사람들은‘아무거나’, 혹은‘네가 원하는 대로’‘, ......한 것 같아’라는 말을 흔히 사용하는 것일까? 왜 자신의 의사를 분명하게 밝히지 않는 것일까?

 

내가 찾은 답은 양보와 배려였다. 상대방을 존중하려는 겸양지심의 표현이다. 하지만 답을 내려놓고 다시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겸양으로만 볼 수 있는가? 혹시 ‘생각하기 싫으니까 네가 정해!’와 같은 귀차니즘은 아니었을까? 혹은 혹시라도 결정이 잘못됐을 경우,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는 아닐까?

 

사람들이 습관처럼 사용하는‘......한 것 같다’라는 말도 마찬가지이다. 많은 사람들이 맛있는 음식을 먹고도‘맛있는 것 같다’, 예쁜 아기를 보고도‘예쁜 것 같다’라고 말을 한다‘. 아, 이 음식 참 맛있다’‘, 아기 참 예쁘다’라고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느낌이나 생각은 주관적인 것임에도 분명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일상에서 사용하는 이런 말투는‘내 말을 듣고 있는 상대방이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을 수 있는 것에 대한 배려’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드러냈을 때 닥칠 수 있는 불이익을 미리 차단하기위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내가 조금 손해 보더라도 상대방을 언짢게 만들거나 다른 견해로 인한 충돌을 피하고자 하는 마음이 늘 잠재해 있는 것이다. 그래서‘겸손하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표현하지 못 하는 우유부단한 사람’‘, 판단력과 결단력이 부족한 사람’으로 비칠 수도 있다.

 

말투에 담긴 이런 태도가 삶 속에서 나타나면 더 심각해진다. 자신의 의지대로 삶을 설계하기보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하루하루를 이렇게 살아도 좋고 저렇게 살아도 좋다는 식의 삶이 연속되면 마치 벽돌을 대충 쌓아 올려 지어놓은 집처럼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위험을 안고 사는 셈이다. 어느 순간 벽돌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면 뒤늦게 삶의 태도에 대해 후회하고 개선해보려고 해도 이미 무너져 내린 벽돌을 다시 쌓아 올리기란 쉬운일이 아니다. 치밀하게 설계하여 벽돌 하나하나를 빈틈없이 쌓아올려야만 거센 비바람에도 견딜 수 있는 것처럼 오늘 하루의 삶도 나의 의지에 따라 충실하게 살았을 때 미래에 풍성한 과일을 수확할 수 있는 것이다.


진정한 겸양지심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또 자신의 느낌이나 생각을 분명하게 드러낸다고 해서 겸양지심이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겸양지심이 무조건 상대방의 결정을 따른다는 의미는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상대방 결정에 따른다고 해도 그것이 유쾌한 선택이 아니었다면, 결정을 한 사람이나 그것을 따르는 사람이나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그런 상황을 초래한‘아무거나’‘, 네가 원하는 대로’는 진정한 겸양이 될 수 없다. 겸양은 나와 상대방 모두가 즐거운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같은 이치로‘......한 것 같다’는 말도 상대를 배려하는 발언이라고 볼 수 없다‘. 내가 언제 그렇다고 했어? 그런 것 같다고 했지.’처럼 언제든지 자신의 실수를 합리화하려 들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햄버거를 주문하기 위해 줄을 서 있었다. 내 앞의 한 청년이 주문하고 있었다“. 치즈버거 주세요!”“양파를 넣을까요?”“양파는 살짝 익히고 토마토는 빼 주세요. 케첩은 내가 뿌려 먹을 테니까 미리 넣지 말아주세요!”“드시고 가실 건가요? 싸 가실 건가요?”“여기서 먹지만 남으면 가지고 갈 수 있도록 포장을 해 주세요. 그리고 얼음을 넣어서 물을 한 잔 주세요. 레몬 하나도 같이 주세요!”

 

둘 사이의 대화는 손님과 종업원 관계에 주고받는 지극히 형식적인 것이었지만 청년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말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며‘아무거나’가 떠올랐다. 물론 개인 한 사람이 자신의 입맛에 맞는 메뉴를 주문하는 것과, 나 이외의 사람들과 함께 어울릴 메뉴를 찾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아무거나’가 아니라‘난 김치찌개가 먹고 싶어!’처럼 자신의 생각이 다른 사람과 같지 않더라도 분명하게 말하는 것이 진정한 배려가 아닐까. 인간관계에서의 서로 다름도 조화라는 이름으로 얼마든지 수정하고 합심해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