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비명(墓碑銘)
04/23/18  

모든 생명체에게 죽음은 곧 소멸이다. 실체의 생명이다 했을 때 생명체는 더 이상 형체로도, 기억으로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법칙에서 예외인 생명체가 있다면 오직 인간이 유일하다.

 

인간의 죽음도 모든 생명체와 같이 형체로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죽음이 다른 생명체와 구별되는 것은 바로 죽고 난 후에도 기억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산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을 기억한다. 죽은 날을 기억해 추모하기도 하고 사진을 들여다보며 추념하기도 한다. 더 오래 기억하도록 무덤을 만들고 묘비를 세운다.

 

묘비에는 죽은 이를 기억할 만한 내용의 문구를 새긴다. 이를 묘비명이라고 한다. 묘비명에는 죽은 자가 살아있을 때 당부한 것을 새기기도 하고, 산 자들이 죽은 자를 기억할 만한 내용을 담기도 한다. 즉 죽은 자가 생전에 뜻하고 추구하며 갈구하던 흔적들을 묘비에 새기기도 하고, 죽은 자를 기억하기 위한 산 자들의 마음을 담기도 한다.

 

과거 한국의 묘비명은 정형화돼 있었다. 관직에 오른사람이었다면 관직명과 본관, 이름 등을 새겨 넣었다. 예를 들어 홍길동이라는 사람이 정삼품 당하관(창선대부)을 지냈다면 묘비 앞면에‘창선대부 00홍 씨 길동지묘’와 같이 적었다. 뒷면에는 죽은 자의 생몰연대를 비롯한 이력과 업적, 자손들의 이름을 적어 넣기도 했다.

 

하지만 서양의 경우는 달랐다. 봉분을 만들지 않기 때문에 죽은 자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바로 묘비였다. 그래서 서로 비슷비슷하게 생긴 한국의 묘비와 달리 그 모양과 거기에 적힌 묘비명도 다양했다.

 

작가 박영만은‘끝내지 않은 마침표’(평단문화사, 2017)에서 동서양 선인들 102명의 묘비명을 소개했다. 소개된 묘비명에는 이런 것들이 있다.

 

‘지나가는 이여, 나를 기억하라. 지금 그대가 살아 있듯이 한 때는 나 또한 살아 있었노라. 내가 지금 잠들어 있듯이 그대 또한 반드시 잠들리라’(백년전쟁이 계속되던 시절 영국 태자였던 에드워드의 묘비명) ‘내가 죽거든 나를 땅에 묻을 때 손을 땅 밖으로 내놓아라. 천하를 손에 쥐었던 이 알렉산더도 떠날 때는 빈손으로 갔다는 것을 이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 주기 위함이다’(유럽을 정복한 알렉산더 대왕의 묘비명) ‘오직 한 순간 동안만 나의 것이었던 그 모든 것들’(영국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묘비명) ‘날이 갈수록 내게 더욱 새로워지는 것은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과 내 마음 속의 도덕률이다.’(임마누엘 칸트의 묘비명) ‘내 우물쭈물하다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작가 버나드쇼의 묘비명)

 

한국의 묘비명에도 근래 들어 과거의 틀을 벗고 다양한 내용이 담기기 시작했다. 승려이며 화가로 활동하며 온갖 기행을 일삼던 걸레스님 중광의 묘비명은‘괜히 왔다 간다.’이며, 시인 조병화의 묘비에는‘나는 어머님 심부름으로 이 세상에 나왔다가 이제 어머님 심부름 다 마치고 어머님께 돌아왔습니다.’라고 적혀 있다. 시인 천상병의 묘비에는 그의 걸작‘귀천’의 한 구절이 적혀 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독립운동가 조봉암의 묘비에는‘우리가 독립운동을 할 때 돈이 준비되어서 한 것도 아니고 가능성이 있어서 한 것도 아니다. 옳은 일이기에 또 아니하고서는 안 될 일이기에 목숨을 걸고 싸웠지 아니하나’라고 적혀 있다.

 

생각해 보면 묘비명은 단순히 죽은 자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죽은 자가 산 자에게 전하는 위로이자 삶의 나침반 같은 것이다. 산 자는 묘비명을 읽으며 죽은 자와 대화하고 자신의 삶을 다시 한 번 성찰하는 계기로 삼는 것이다. 그리고 묘비명을 통해 인간의 삶은 궁극적으로 죽음까지 포함된다는 것을, 그래서 살아 있을 때 충실한 삶을 살았다면 죽음은 결코 두려운 것이 아니라는 지혜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지난해 한국인 사망자 가운데 82.7%가 화장을 했다. 한국에서 화장률 집계를 시작했던 1994년 20.5%였던 것과 비교하면 4배가량 증가한 셈이다. 이런 추세라면 분묘가 줄어드는 만큼 묘비도 줄어들 것이다. 따라서 묘비명을 통해 죽은 자가 남긴 삶의 지표를 찾기도 힘들어 질 것으로 보인다.

 

그렇더라도 결국 우리는‘끝내지 않은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 유언으로든 묘비명으로든 혹은 사진이나 영상으로든 우리는 죽어서도 후세와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 그때 나는 후손들과 어떤 이야기를 나눌 것인가? 분명한 것은 버나드 쇼처럼‘우물쭈물’살아온 삶을 고백할 용기도 없으니 이제부터라도 좀 더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해야겠다.

 

과연 나의 묘비에는 어떤 말이 새겨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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