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소연을 늘어놓을 곳
04/23/18  

대학을 갓 졸업하고나서 1년 조금 넘게 집 앞 SAT 학원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다대학 입학 원서 대행도 맡아주는 학원이었는데지금도 공부 꽤나 잘하는  12학년 여학생의 대학교 입학원서 대행을 담당했을 때를 종종 떠올리곤 한다.  초반 작업으로 그 여학생의 어머니와 몇 번의 미팅을 가졌는데 그 어머니는 내 앞에서 울었다웃었다를 반복했고 그 당시미혼이었던 나는 그 어머니의 마음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우선 그 여학생에 대해서 잠깐 소개하자면 명문고교 우등생 프로그램 내신 성적은 평균4.0 (A) 만점에서 4.4, 대입 시험 SAT에서도 거의 만점을 받은 우등생이었다게다가 배구첼로 등 예체능 활동도 게을리하지 않고 병원에서 자원봉사까지 하고 있었다예쁘장한얼굴에 연약한 체구로 얼마나 바쁘게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지 하교 후 집에 오면 낮잠을 꼭꼭 챙겨 자며 베짱이처럼 룰루랄라 놀기만 했던 내 고등학교 시절이 떠올라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이 우등생의 엄마는 아이가 의대에 진학할 것을 기대하고 있었지만 평생 엄마 말을 거역한적 없는 모범생 엄친딸이 왠일인지 요즘들어 속을 썩인다는 것이였다아이의 딜레마는 본인이 도무지 뭘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그도 그럴 것이 평생 엄마가 시키는 대로 공부밖에 한 것이 없어서 본인이 뭘 잘 하고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고 털어놓았다그냥 엄마가 시키는 대로 공부만 했던 자기 자신을  뒤돌아보니 마치 바보가 된 기분이라고…...

 

어머니는 그 당시 틈만 나면 학원을 찾아와 대입 상담보다는 고3병에 걸린 딸 아이에 대해못마땅한 점들을 늘어놓곤 하셨다. "친구들하고만 어울리려고 하고 내 말을 들으려 하질않아요.",  "어제는 울면서 엄마 때문에 하고 싶은 걸 하나도 못 한다고 하더군요." , "매일아침 입을 쑥 내밀고 학교에 가요." 우등생 자녀를 둔 40대 후반의 엄마가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사회 초년생이였던 나를 붙잡고 이런저런 하소연을 풀어놓을 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이렇게 성적이 우수하고 책임감 강한 딸을 두고도 만족하지 못하는 어머니가 의아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생각하니 그녀에게 필요했던 건 나의 대학 입시에 관한 전문적인 조언보다는 아이와의 갈등을 털어놓을 대상이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마치 병원에  가면 X-ray 찍어주고 의사가  “별 이상 없습니다.”라고 말해주었을 뿐인데 아팠던 곳이 괜찮아지고 마음이 훨씬 편해지는 것처럼...

 

아이 엄마는 적지 않은 돈을 지불하고 우리에게 입학 대행을 맡겼지만 애초부터 이 학생에게는 그런 서비스가 필요치 않았다그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었던 그녀는 그저 본인이진정으로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찾고 싶었던 것뿐이었고 그로 인해 엄마와 잠시 갈등을 빚고 있었을 뿐이다엄마와 딸이 조금 더 일찌감치 서로의 마음을 털어놓고 상의했더라면 굳이 돈을 지불하고 누군가를 찾아가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하소연을 늘어놓을 상대'도 필요하지 않았을지 모르겠다

 

그 당시 미혼에 사회 초년생이었던 나도 이제는 학부모아줌마가 되었다이제는 나도  전혀 상관없는 사람에게 뜬금없는 푸념을 늘어놓기도 하고 의외의 하소연을 듣기도 한다그때마다 그 어머니가 떠오른다그 당시 모범생 딸은 치대에 입학했다고 들었는데 지금쯤 멋진 치과의사가 되어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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