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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없는 물음
05/14/18  |  조회:111  

104세 생일을 막 지낸 호주 과학자 데이비드 구달이 스위스 바젤에서 지난 10일 안락사로 생을 마감했다. 구달 박사는 최근 ABC방송 인터뷰에서 “질병은 없지만 건강이 나빠지면 지금보다 더 불행해질 것 같다”며 “104세라는 나이에 이르게 된 것을 매우 후회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넘어져 병원에 입원했던 2개월 전쯤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한 바 있다.

 

구달 박사는 호주에서 스스로 삶을 마감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호주는 안락사를 금지하고 있다. 빅토리아주가 지난해 안락사를 합법화했지만 불치병에 걸려 6개월 미만의 시한부 선고가 내려진 이들만 가능하다. 그래서 구달 박사는 스위스 행을 택했다. 스위스에선 불치병에 걸리지 않았더라도 조력 자살을 원한다는 의향을 밝히면 안락사를 할 수 있다.

그는 죽기 전에 “더는 삶을 지속하고 싶지 않다. 생을 마칠 기회를 얻게 돼 행복하다”고 말했다. “호주에서 삶을 마치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질 않았고, 호주가 스위스보다 한참 뒤떨어져 있다는 것이 유감스럽다”고 했다. 이어 “노인이 삶을 지속해야 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도구로 내가 기억되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이건영은 안락사와 존엄사를 소설의 주제로 다루고 있다. 《마지막 인사》에서 주인공은 말기 간암 판정을 받은 오십대 중반의 신경외과 전문의이며 뇌종양 선고를 받은 임신한 아내의 존엄사를 돕는다는 것이 큰 줄거리이다. 그는 뇌종양에 걸린 아내가 뱃속의 아이를 살리기 위해 뇌수술을 받아 스스로 식물인간이 되자 마취제를 투여해 생을 마감케 한다. 외국 유학에서 돌아온 뒤에도 안락사를 여러 차례 도운 주인공은 결국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게 된다. 본인도 약물로 목숨을 끊는 방법을 택한다.

 

영국의 유명한 지휘자 에드워드 다운스와 발레리나 출신 아내 조앤의 이야기는 소설보다 더 드라마틱하다. 남편 다운스는 노환으로 수년간에 걸쳐 시각과 청각을 잃어버렸다. 특히 지휘자인 다운스에게 청력 상실은 치명적이었다. 수년에 걸쳐 남편 병간호를 하고 있던 조앤은 췌장암 말기로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 이에 85세의 다운스는 불치병 환자는 아니었지만 아내와 함께 죽음을 맞기로 결심한다. 아내 없는 삶을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걸림돌이 있었다. 영국은 안락사를 법으로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부는 조력자살을 인정하는 스위스 취리히로 간다. 자살 전문병원에서 부부는 나란히 손잡고 침대에 누워 자녀들이 보는 앞에서 소량의 약물을 마시고 자살에 이른다. 이 사연은 안락사 허용에 대한 논란과 더불어 애틋한 사랑 이야기로 회자되고 있다.

 

말기암 환자를 가만히 두면 3개월 안에 죽는다고 할 때, 항암치료를 해서 2~3개월 더 살 수 있다고 하면 가족들은 항암치료를 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항암치료라는 것이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다. 덜 고통스럽게 3개월을 사느냐, 더 고통스럽게 5개월을 사느냐, 이것이 선택의 문제가 될 수 있는가? 또, 노인의 경우 인공호흡을 하면 갈비뼈가 여럿 부러진다. 그렇다고 완전히 살리는 것도 아니다. 갈비뼈가 부러지고 완전한 상태의 삶이 아닌 고통스러운 상태에서 생명을 연장하며 호흡을 하는 것이 더 나은가 아니면 고통 없이 죽어 가는 것이 더 나은가? 본인 의사가 중요하기 때문에 누구나 원한다면 죽음을 택해도 좋은 것인가?

 

구달 박사는 암에 걸린 것도 아니고 시한부 판정을 받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는 남의 도움을 받으며 불편한 몸으로 더 이상 살려지기를 원하지 않았다. 자력으로 살기 힘들다고 느꼈기에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면서 죽기를 원했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살아 있는 생명은 반드시 소멸한다. 이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인간도 피해 갈 수 없다. 그러나 죽음은 인간에게 미지의 영역이다. 아무도 우리에게 죽음이 어떤 것이라고 말해 줄 수 없다. 그것은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풀 수 없는 수수께끼이고 두려움의 대상이다. 우리 앞에 펼쳐진 삶이 풍요롭고 화려할수록, 삶에 대한 애착이 강할수록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비례해서 커진다. 반대로 삶이 힘들어질 때, 삶에 대한 욕구가 사라질 때, 마지막 도피처로서 죽음은 인간을 유혹하기도 한다. 앞서 말한 안락사나 존엄사를 택한 사람들도 삶 속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는 판단 하에 죽음을 택했을 것이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사실 자신의 삶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다. 삶과 죽음은 떼어 놓을 수 없다. 삶과 죽음을 유한한 생물학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인간의 정신과 영혼에서 펼쳐지는 내면의 사건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안창해. 타운뉴스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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