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의 김치 사랑
04/23/18  

"프랑스 음식이 예술에 가깝고중국 음식이 우주를 지향하고일본 음식이 자연에 닿아 있다면 우리네 음식엔 풍류가 담겨 있다고달픈 현실 속에서도 늘 마음의 여유를 갖고 즐겁게 살아갈 줄 아는 삶의 지혜와 멋이 곧 풍류다삶의 지혜는 어머니의 손맛에 녹아들고멋은 삶 속에 스며든다."


그때가 90 년 말 봄이었던가…...
나는 대학교 강의실에 앉아서 주로 유럽 여행 루트를 계획하거나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읽었다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서 영원한 사랑이 없다고 슬퍼하며 어른이 되어가는성장의 고통 같은 것을 치루던 시기였다그렇게 세월이 흘러간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던 대학 시절 나는 용돈이라도 벌어볼 작정으로 테리야끼를 전문으로 하는 음식점에서 파트타임으로 일을 했었다주인 아주머니의 솜씨가 좋아서 찾아오는 손님들은 음식이 맛있다며 흡족해 했고 단골 손님들도 꽤 있는 가게였다먹다 남은 음식 쓰레기가 잔뜩 들어있는 쓰레기 봉지를 치우거나 대걸레로 바닥을 청소하고 닭다리들을 손질해야 하는 일 따위를 제외한다면 일하기에도 나쁘지 않았다.

그 가게에서는 간간히 찾아와서 김치를 찾는 손님들을 위하여 김치도 판매했었는데 종종김치를 찾는 외국인들도 있었다외국인들이 한국 음식을 좋아하긴 하지만 파마늘 냄새때문에 쉽게 손이 가지 않는 것도 사실인데 유독 김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중에 보름에 한 번 정도 찾아와서 김치를 작은 병으로 한 병씩 사가는 동양 남자가 있었는데 그는 때로는 식당에서 김치만 주문해서 먹고 가곤 하였다새빨간 김치를 조용히 먹고있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신기하다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었다아무 것도곁들이지 않고 김치만 한 접시를 비우는 모습이 다소 안쓰러워 밥을 좀 주겠다고 해도 그는괜찮다며 김치만 우적우적 씹어 먹었다.

나는 번번히 찾아와서 김치를 사 가거나 김치를 한 접시씩 비우고 가는 그 손님이 궁금해서미칠 지경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점심시간이 지나 손님이 없고 한가한 때였다그가 뚜벅뚜벅 카운터에 있는 내게로 걸어와 내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더니 한글을 읽을 수 있냐고 조심스럽게 묻는 것이었다내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본인은 원래 한국인이며 한국에서 태어났으나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세살 때 미국으로 입양되었다고 한다미국 양부모 밑에서 성장하다가 대학을 졸업하고 나니 친부모에 대한 그리움과 궁금증이 밀려와 지난해 고국을 방문해 우여곡절 끝에 친어머니를 찾게 되었다고한다친어머니를 만나고 미국으로 돌아와 처음으로 친어머니로부터 편지를 받게 되었는데본인은 한글을 읽을 수 없어서 편지를 받고도 읽지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나에게 편지 내용을 번역해 줄 수 있냐고 묻는 그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편지 속의 어머니는 아들을 걱정하고 계셨다대부분의 어머니처럼 아들의 건강과 식사에관한 것이 당연 최대의 관심사이자 걱정거리였다내가 "어머니께서 당신에게 여자친구가있는지 궁금해 하시네요." 라고 말하자 그가 소리내어 웃었다그의 웃음 뒤로 아찔한 슬픔이 스쳐갔다지금도 이따금씩 그때 그의 웃음이 귓가에 울려 퍼진다기억에 없는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그의 눈빛이 슬퍼보여서 그에게 어머니의 편지를 읽어주던 내 마음에도 희비쌍곡선이 생겨났다.

한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고 우리말을 하지도 알아듣지도 못하는 그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이 내 가슴에도 물결쳤다그는 김치를 먹으며 자기를 보내야했던 어머니를 생각했던 것일까......

 

나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그해 여름에 파트타임 일을 그만두게 되었고 그 후로는 그를 두 번다시 만나지 못했지만 조용히 그의 행복을 빌었다하지만 가끔씩 잘 익은 김치를 보거나톡 쏘는 김치 냄새를 맡을 때면 그 사내의 김치 사랑이 떠오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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