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야 1.5세 아줌마
홈으로 나는야 1.5세 아줌마
값비싼 계곡 그늘
08/18/25  

매년 여름방학이면 제주에 사는 조카가 우리 집에 온다. 우리 집 둘째와 같은 나이이자 외동인 이 아이는 서로에게 단 하나뿐인 사촌이지만 멀리 살다 보니 자주 만나지 못한다. 제주와 서울은 비행기로 한 시간이면 닿는 거리지만, 각자의 생활이 있다 보니 여러 장벽이 그 거리를 훨씬 더 멀게 만드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여름방학만큼은 무리를 해서라도 이 만남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짧은 며칠이지만 그 시간의 웃음과 추억이 몹시 소중하기 때문이다.

작년 여름에는 함께 바닷가에 다녀왔는데 이번에는 계곡을 가기로 했다. 바다보다 짧은 준비로 다녀올 수 있고, 강렬한 햇빛 대신 나무 그늘과 시원한 물이 반겨줄 거라는 기대가 컸다. 전날 밤, 나는 검색창에 온갖 단어를 조합해 넣었다. ‘서울 근교 계곡’, ‘아이와 가기 좋은 계곡’, ‘그늘 많은 계곡’… 검색 결과는 끝도 없었다. 블로그 후기를 읽고, 유튜브 영상 속 사람들의 표정을 살폈다. 어떤 곳은 무료였지만 주차가 멀었고, 어떤 곳은 시설이 잘 갖춰져 있었지만 붐볐다. 마음이 기울면 댓글을 내려 읽었고, 다시 망설이면 지도를 켜 거리와 시간을 계산했다.

다행히도 서울 근교에도 갈만한 계곡이 꽤 많이 있었다. 나는 당일 아침 일찍, 가장 조건이 나아 보이는 곳으로 전화를 걸었다. 금요일이라 주말보다는 낫겠지 생각했는데 평상 자리는 이미 마감이었다. 남은 건 7만 원짜리 돗자리 자리뿐이고 선불 계좌이체 후 도착 순서대로 자리를 배정한다고 했다. 계곡에 가는데 돈을 미리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조금 낯설었지만, 아이 넷이 동행하는 데다가 그늘과 주차가 보장되는 편리를 생각하면 오래 망설일 수 없었다. 그렇게 송금을 마치고 간단히 도시락과 간식을 챙겨 출발했다.

아침 9시 반쯤 도착했을 때, 이미 주차장은 절반 이상 찼다. 하지만 계곡 물줄기 사이사이에 여유가 있었고, 아이들이 뛰어들어도 부딪히지 않을 만큼 공간이 남아 있었다. 그늘 아래 돗자리를 깔고 짐을 풀자, 아이들은 신발을 벗고 물가로 달려갔다. 나도 그 뒤를 따라가 발목을 담가보았다. 예상보다 훨씬 차가운 물이 발끝을 감싸자 심장이 두 배쯤 더 빨리 뛰었다. 물 위로 햇빛이 반짝였고, 바람은 나뭇잎 사이를 스치며 시원한 기운을 실어 날랐다. 물살은 미세하게 발목을 훑고 지나가면서도 묘하게 발끝을 붙잡았다.

11시가 넘어가자 풍경은 순식간에 변했다. 돗자리는 이미 만석이 되었고, 물속은 사람들로 빼곡해졌다. 아이들이 물속에서 움직일 때마다 이제 모든 동작에 제약이 따랐다. 그늘 아래에서는 가스버너 위로 찌개가 끓고, 그릴 위에는 삼겹살 기름이 튀어 오르고 있었다. 수박이 쩍 갈라지며 빨간 속살을 드러냈고, 끊임없이 소주잔이 부딪히는 소리에 웃음이 이어졌다. 한쪽에서는 아이들이 과자를 나눠 먹고, 다른 한쪽에서는 어른들이 부채질을 하며 고기를 뒤집었다. 냄새와 소리, 왁자지껄한 대화와 흥이 오른 술자리가 뒤섞이며, 무더위를 즐기는 설렘이 계곡 풍경을 가득 메웠다.

과연 계곡 앞 그늘은 도심보다 훨씬 시원했다. 물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나무 그늘이 합쳐지니 무더위도 이겨낼 만했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무거운 짐을 이고 지고 와서도 이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물가 그늘에 앉아 보내는 이 시간이 특별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오늘 아침 내가 7만 원을 송금했다는 사실이 자꾸만 떠올랐다. 본래 누구의 것도 아닐 이 계곡이, 값이 매겨진 풍경처럼 느껴져서 마음 한켠이 자꾸 불편했다.

물론 이유는 있다. 계곡 앞의 땅은 사유지일 것이다. 물 자체는 누구의 소유가 아니지만, 그 물가에 자리 잡을 수 있는 땅이 개인 소유라면 주차와 그늘, 자리를 사용하는 데 비용이 드는 건 당연하다. 해수욕장도 마찬가지다. 바다 안은 누구나 들어갈 수 있지만, 그 앞의 땅과 편의시설은 지자체나 민간이 관리하며 요금을 받는다. 관리가 이뤄지는 공간은 쓰레기가 줄고, 화장실과 샤워장이 유지되고, 안전요원이 배치되는 장점이 있다. 덕분에 해변이 깨끗하게 유지되고 사고 위험이 줄어드는 것도 사실이다. 피서철이면 해변에서 파라솔을 빌리거나 샤워를 하기 위해 꽤 높은 요금을 지불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예전에 어떤 계곡 앞 음식점에서 다른 곳보다 두 배쯤 비싼 백숙을 사 먹고서야 물에 발을 담글 수 있었던 적이 있었는데, 아마 그런 기억이 쌓이면서 더더욱 아쉬움이 남는 것 같다.

오후가 되자 계곡의 물살은 사람의 물결에 묻혔다. 물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그 차가움이 주는 상쾌함보다 사람 사이를 피해 움직이는 피곤함이 먼저 느껴졌다. 아이들은 잠시 물속에 몸을 담갔다가 이내 돗자리로 돌아와 과일을 집어 먹었다. 나도 그늘 아래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아이들이 웃고 떠드는 모습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하지만 우리는 예상보다 일찍 자리를 접었다. 온종일 놀 기세로 돗자리를 빌렸지만 몇 시간 놀지 못하고 돗자리를 접었다. 시원하고 즐거웠지만, 나무 그늘 한 자리조차 돈을 내야 앉을 수 있는 현실 앞에 물정 모르는 한심한 도시사람이 된 것 같아 조금 씁쓸했다. 다음에는 무료 계곡을 더 열심히 찾아봐야겠다.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