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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언어의 속사정
09/22/25  

언젠가 아이들을 훈육하다가 무심코 “Stop it!”이라고 소리친 적이 있다. 같은 상황에서 “그만해”라고 말했을 때와는 뉘앙스가 달라진다. 영어는 순간을 날카롭게 끊어내는 칼 같고, 한국어는 말끝에 여운이 남아 마음을 흔드는 종소리 같았다. 두 언어는 내 안에서 늘 충돌하고 협력하면서, 때로는 나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나는 두 언어를 다 할 수 있다는 장점을 안고 살지만, 동시에 어느 쪽에서도 온전히 안착하지 못한 채 떠 있는 사람처럼 살아왔다.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 무렵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고, 대학교까지 마쳤다. 그리고 결혼과 육아를 지나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어느덧 8년째 살고 있다. 내 삶은 한국어와 영어가 교차하며 그려진 궤적 위에 놓여 있다. 이민 초기에는 점심시간에 친구들이 주고받는 농담을 이해하지 못한 채 멀뚱히 앉아 있던 기억이 있다. 집에 돌아와 부모님과 한국어로 이야기했지만, 그 한국어는 이미 어딘가 낯설어져 있었다. 미국 학교에서 배운 영어가 서툴게 몸에 붙는 동안, 집에서 쓰는 한국어는 점점 짧고 투박해졌다. 학교에서는 영어, 집에서는 한국어,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완전히 편안하지 않았다. 언어의 틈바구니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그 틈바구니에서 나는 종종 언어가 세계를 나누는 방식을 실감했다. 같은 사물과 감정을 가리키면서도 두 언어는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주곤 했다. 색 하나만 봐도 그렇다. 영어에서 yellow는 그저 노란색이다. 조금 더 세밀히 구분하려면 light, dark, pale 같은 수식을 붙인다. 그러나 한국어의 노랑은 훨씬 다채롭다. 노랗다, 노르스름하다, 누리끼리하다, 샛노랗다. 같은 노란색이라도 상황과 질감, 분위기에 따라 다른 단어를 고를 수 있다. 샛노란 병아리와 누리끼리한 종이는 전혀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언어 하나가 세계를 바라보는 감각을 이렇게 달라지게 한다.

감정의 언어도 그렇다. 영어의 “I’m sorry”는 단순한 사과를 넘어선다. 누군가 가족을 잃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병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I’m sorry”라고 말하면 그 안에 공감과 위로가 담긴다. 그러나 한국어에서 “미안해”는 거의 언제나 내가 잘못했을 때 쓰인다. 같은 상황에서 “미안해”라고 말하면 오히려 어색하거나 무례하게 들릴 수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안타깝다” 혹은 “마음이 아프다”라는 말을 꺼낸다. 단어 하나가 담는 문화의 결이 이렇게 다르다.

이렇듯 두 언어는 쓰임새도 다르고 전달되는 뉘앙스도 달라서, 어떤 순간에는 영어가 더 자연스럽고, 또 어떤 순간에는 한국어가 더 편안하게 다가온다. 그래서 나는 언젠가부터 두 언어 사이에서 작은 실험을 하곤 했다. 감정을 꺼낼 때는 영어가 훨씬 자유롭고, 무언가를 묘사할 때는 한국어가 더 풍부하고 매끄럽게 느껴졌다.

예를 들어 분노나 애정, 사랑 같은 감정을 고백할 때 영어는 덜 무겁다. “I love you”는 일상적인 말이지만, “사랑해”라고 말하려면 훨씬 큰 결심이 필요하다. “I’m mad”라고 하면 금세 감정이 터져 나오지만, “화났다”라고 하면 더 단단하고 불가역적인 감정처럼 들린다.

반대로 무언가를 묘사하거나 설명할 때는 한국어가 훨씬 세밀하다. 비를 예로 들어보자. 영어에도 It’s drizzling이나 It’s pouring처럼 비의 양과 세기를 표현하는 다양한 말이 있다. 그러나 한국어는 거기에 소리와 모양까지 덧입힌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주룩주룩’ 떨어지고, ‘퍼붓는다’고 말할 때, 단순히 양과 세기를 넘어 비의 질감과 소리까지 귀에 전해진다. 같은 현상을 묘사해도 언어가 끌어내는 감각은 이렇게 달라진다. 그래서 내 안에서 영어는 감정의 언어이고, 한국어는 묘사의 언어다.

이제 나는 아이들과 함께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아이들도 곧 나처럼 언어의 경계에서 불편함과 답답함, 때로는 서러움을 겪을 것이다. 영어로는 쉽게 말할 수 있는데 한국어로는 무겁게만 들리고, 한국어로는 풍성하게 묘사되는데 영어로는 건조해지는 순간들이 찾아올 것이다. 그 혼란과 곤란을 대신 짊어져 줄 수는 없다. 다만 나는 안다. 언어의 무게는 처음엔 짐이 되지만, 시간이 쌓이면 결국 자기만의 목소리를 만들어주는 힘이 된다는 것을.

언어가 언제나 마음을 온전히 담아내진 못한다. 때로는 어느 쪽에도 없는 단어 앞에서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공백을 견디는 힘이 결국 우리를 더 깊게 만든다. 나는 여전히 두 언어 사이에서 흔들리지만, 그 흔들림 속에서만 들을 수 있는 소리를 배웠다. 언젠가 아이들도 자신만의 언어로 세상을 부르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 나는 두 언어의 틈새에서, 불편함과 풍요로움 사이를 오가며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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