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연말
12/29/25  

마흔을 막 앞두고 미국에서 서울로 돌아온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고개를 저었다. 왜 하필 지금 한국이냐고 물었다. 남들은 미국에 남으려고 그렇게 애를 쓰는데 왜 굳이 나오느냐고 했다. 한국말도 제대로 못하는 아이들을 넷이나 데리고 한국이라니 괜찮겠느냐는 질문도 빠지지 않았다. 그 말들은 대부분 걱정의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 안에는 분명한 놀람이 섞여 있었다. 굳이 가지 않아도 될 길을 택했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남편이 여섯 달 먼저 한국으로 들어가고 나는 미국에 남아 아이 넷을 데리고 집을 정리했다. 국제 이삿짐을 싸는 일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버릴 것과 가져갈 것을 나누는 일 앞에서 손이 자주 멈췄다. 아이들이 어릴 적 쓰던 물건들, 오래된 서류와 사진들, 쉽게 정리되지 않는 것들이 박스 안에 차곡차곡 쌓였다. 정들었던 미국에서의 첫 집을 내놓을 때도 감상에 젖어 있을 틈은 없었다. 오래 알고 지낸 이웃과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건넬 때면 잘 지내라는 말보다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 하는 인사가 더 많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쪼그라들었지만 그때의 나는 계획을 세울 여유가 없었다. 그저 오늘 해야 할 일을 하나씩 해내는 수밖에 없었다. 내 인생의 많은 장면들이 그랬다. 아무리 미리 그림을 그려두어도 상황이 먼저 왔고 나는 그 안에서 다음 장면으로 넘어갔다.

8년이 흘렀다. 아이들은 훌쩍 자랐고 어느새 어엿한 한국 아이들이 되어 있었다. 그 사이 나 역시 다른 리듬에 익숙해졌다. 그런데 다시 미국으로 간다고 했을 때 주위의 반응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번에는 말들이 조금 더 조심스러워졌다. 이제는 좀 정착할 나이 아니냐는 말이 들렸고 내 상황을 떠올리면 눈앞이 캄캄하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걱정은 여전히 진심이었고 그 진심은 오히려 마음을 더 무겁게 했다.

나라가 바뀌고 언어가 바뀌고 주소가 달라질 때마다 모든 것이 처음처럼 느껴졌지만 내가 하던 일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아이들의 엄마였고 밥을 챙기고 가방을 확인하고 잠들기 전 불을 끄는 사람이었다. 어디에 있든 하루의 중심에는 늘 먹고 자는 일이 있었고 그 사이사이에 사소한 일들이 끼어들었다. 말 한마디에 서로 눈을 흘기다가도 금세 아무 일 없다는 듯 같은 테이블에 앉아 밥을 먹고 웃었다. 아이들 손을 잡고 공항 출국장을 지나던 순간들, 밤늦게 거실 한가운데 쌓아둔 박스 위에 앉아 서류를 정리하던 시간들 역시 그런 하루의 연장이었다. 그 장면들은 서로 다른 시기였지만 묘하게 같은 속도로 흘러갔다. 급하지도 느리지도 않게 그저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듯 하루가 이어졌다.

2026년을 앞두고 있지만 새해 다짐은 세우지 않기로 했다. 작년에도 그랬고 아마 내년에도 비슷할 것이다. 계획대로 된 일이 많지 않았던 인생에서 또다시 다짐을 적어 내려가는 일은 이제 자연스럽지 않다. 열심히 살겠다는 말도 굳이 꺼내지 않으려고 한다. 말하지 않아도 이미 그렇게 흘러온 시간이 길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자라고 있었고 하루는 계속 넘어가고 있었고 삶은 한 번도 멈춰준 적이 없었다.

2026년은 아마도 또 예측할 수 없는 해가 될 것이다. 미국에서의 삶이 생각보다 빠르게 자리를 잡을 수도 있고 다시 흔들릴 수도 있다. 그 가능성들 앞에서 나는 여전히 조심스럽다. 이렇게 안정적이지 못한 상태로 연말연시를 맞이하는 것이 참으로 오랜만이다. 예년 같으면 한 해를 정리하며 마음을 다잡고 새해를 준비했을 텐데 이번 겨울은 조금 다르다.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이 그대로 남아 있고 아직 제자리를 찾지 못한 마음들도 함께 연말을 지나고 있다. 그럼에도 예전만큼 겁이 나지는 않는다. 이보다 더 버거운 장면들을 지나온 시간이 이미 충분히 쌓여 있기 때문이다. 큰 그림이 없어도 하루하루는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여러 번 몸으로 배웠다.

연말이 되면 모두가 정리하고 다짐하고 새해를 준비한다. 달력의 마지막 장을 넘기며 마음도 함께 정리해야 할 것처럼 느껴지는 시기다. 하지만 올해의 나는 그 흐름에서 살짝 비켜서기로 했다. 아무것도 완전히 정리하지 않은 채로 연말을 보내고 조심스럽게 새해를 맞이해도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허락해보려 한다. 삶은 늘 준비되지 않은 채로 시작되었고 나는 그 안에서 계속 다음 장면으로 넘어왔다. 거창한 계획과 특별한 다짐이 없더라도 그렇게 살아지면서, 또 한 해를 지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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