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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팅턴에서 만난 세 마녀
05/04/26  

▲ Original Work: Painting by Henry Fuseli (Swiss Artist) / Source: Art UK (artuk.org)


4월의 헌팅턴 정원은 평화로웠다. 꽃은 활짝 피었고, 햇살은 부드러웠으며, 사람들의 표정은 느긋했다. 그러나 그 고요한 풍경을 지나 들어선 전시실, 한 작품 앞에서 얼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곳에만 오면 발걸음이 저절로 멈춰지면서 표정이 굳어졌다. 제대로 그림을 감상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눈길을 다른 쪽으로 돌리면서도 한동안 서 있곤 했다. 왜 그럴까? 나의 그런 행동이 의아해 이번에는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 그림에 담긴 의미를 찾기 시작했다.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그림 속의 광기와 불안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내 안에 무어라 설명하기 어려운 전율이 느껴졌다. 그 그림은 The Three Witches(세 마녀), 그리고 그 화가는 Henry Fuseli이다. 이 작품은 The Huntington Library, Art Museum, and Botanical Gardens이 2014년 소장한 이후 지금까지 관람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그러나 ‘맞이한다’는 표현은 어쩌면 정확한 표현이 아닐 수도 있다. 이 그림은 관람객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붙잡는다. 그리고 묻는다.

정면에서 튀어나오 것처럼 등장하는 세 인물은 모두 흰 천으로 몸을 감싼 채 어둠 속에서 부유하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 왼쪽 인물은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키고, 가운데와 오른쪽 인물은 입과 턱에 손을 댄 채 광기에 찬 눈으로 응시한다. 그 시선은 단순한 공포를 넘어선다. 마치 ‘바로 너’라고 앞에 서있는 사람을 지목하는 것 같은 압박감이 느껴진다. 이 강렬한 장면은 셰익스피어의 맥베스(Macbeth), 그중에서도 가장 극적인 전환점인 1막 3장에서 시작한다.

퓨슬리는 스위스 태생으로 영국에서 활동하며 셰익스피어 작품을 시각적으로 해석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그의 화풍은 극적이다. 강렬한 명암 대비를 통해 빛과 어둠의 경계를 극대화하고, 인간 내면의 공포와 욕망을 무대 위의 장면처럼 묘사했다. 「세 마녀」에서도 그 특징은 극에 달한다. 왼쪽 위에서 떨어지는 빛은 인물들의 얼굴만을 부각시키고, 나머지는 철저히 어둠 속에 두었다. 그 대비는 단순한 시각적 효과를 넘어 인간 존재의 이중성을 상징하는 듯하다.

이 이중성에 의미를 더 해주는 것은 이 그림을 X-레이로 분석해보니, 캔버스 아래에 한 남성의 초상화가 숨겨져 있었다는 점이다. 하나의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를 덮고, 그 위에 다시 새로운 이야기를 그린 셈이다. 마치 인간의 욕망이 쌓여 또 다른 운명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셰익스피어의 원작을 살펴보면, 폭풍이 몰아치는 황야에서 맥베스와 반쿠오는 세 마녀를 만난다. 이들은 단순한 ‘마녀’가 아니다. ‘Weird Sisters’, 즉 운명을 예언하고 조종하는 존재들이다. 세 마녀는 맥베스에게 세 가지를 말한다. “글래미스 영주여, 만세! 카워드 영주여, 만세! 그리고 장차 왕이 될 자여, 만세!”

이 중 두 번째 예언, 카워드의 영주가 되면서, 맥베스는 왕이 되고자하는 욕망에 사로잡히게 되고 마음에 균열이 생긴다. 모든 비극은 여기서 시작된다. 예언이 미래를 만드는가, 아니면 인간의 선택이 미래를 만드는가. 마녀들은 방향을 제시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 방향을 ‘욕망’으로 바꾼 것은 맥베스 자신이다. 충성스러운 장군이며 신하였던 그가 그 순간 왕위를 상상한다. 그리고 바로 그 생각이 비극의 씨앗이 된다.

퓨슬리의 그림이 섬뜩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세 마녀의 표정이 단순히 무섭기 때문은 아니다. 그들은 이미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이미 벌어진 일 뿐만 아니라 앞으로 벌어질 일들도 알고 있다는 표정. 그리고 그 시선은 그들 눈앞에 있는 맥베스가 아니라, 그림 앞에 서있는 우리를 향하고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예언’을 만난다. 성공할 것이라는 말, 실패할 것이라는 말, 혹은 더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 섞인 말, 문제는 이 말들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태도에 있다. 달콤한 말은 쉽게 욕망으로 변하고, 욕망은 때로는 판단을 흐리게 한다. 반쿠오가 경계했던 것도 바로 이것이었다. “마녀의 말은 달콤하지만, 결국 파멸로 이끌 수 있다.”

현대 사회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정보는 넘쳐나고, 미래에 대한 ‘예측’은 끊임없이 쏟아진다. 그러나 그 모든 것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나는 과연 지금 바른 선택을 하고 있는가?

그날 헌팅턴 정원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러나 나에게 더 오래 기억되는 것은 정원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그 어두운 캔버스 속의 세 마녀였다. 「세 마녀」는 단순한 고딕 회화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내면을 향한 질문이며, 동시에 경고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오래 전에 그 ‘마녀’들을 만났고, 지금도 그들의 속삭임을 들으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안창해. 타운뉴스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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